2021 세종포럼 인문학 특강-박한표(인문운동가)-제1부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1-07-01 15: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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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시대적 가치-왜 인문학인가?]
1. 인문학이란?

 

인문학의 시대적 가치-왜 인문학인가?

 

인문운동가 박한표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제1부 인문학이란?

 

인간이 사는 무대는 두 덩어리이다. 인간이 만든 덩어리와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간이 만든 것, 안 만든 것이다.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는 인간과 별 관계없이 자기가 가진 원칙에 따라 자기 알아서 스스로 돌아간다. 그걸 우리는 자연이라 한다. 한문을 풀어보아도 자연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인간이 만든 덩어리는 문명이라 한다. 여기서 문자가 들어가면 인간의 손이 닿았다는 뜻이다. 인문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이다. 문자는 인간이 만든 기호이고, 문학은 인간이 만든 이야기에 관한 지적 활동이다. 문명은 문화라고 하는 인간의 독특한 활동이 만든 결과이다. 문화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거나 만들어서(=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에서 학을 빼고 '인문'하면 이해가 쉽다. 인문이란 말 그대로 하면 인간의 무늬와 인간이 그리는 무늬, 둘로 나누어야 한다고 본다. 인문과 함께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천문-하늘이 그리는 무늬'이란 말이 있다. 그리고 '천지인'을 생각한다면 '지문-땅이 그리는 무늬'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있다. 천문과 지문은 ''가 지배한다면, ''란 옥돌에 새겨진 무늬란다. 인간과 별 상관없이 자연이 그리는 무늬인 것이다. 이에 비해 인문은 인간에게 새겨져 있고, 인간이 관여하는 무늬라면, 인문은 ''보다는 ''에 방점이 찍힌다. 인간은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무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도 하나의 큰 무늬, 커다란 결 위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 각자는 하나의 커다란 결속에서 움직이지만 각각 '다름'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인문이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근본적인 철학적 요소들과 인간 중심의 근원적인 사상을 다룬다. 그 이유는 좀 더 나은 삶, 지혜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만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인간끼리 잘 살자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힘든 처지에 놓인 그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고, 이런 것을 '인문정신'이라고 한다. 요음 관심받는 것도 관심을 주는 것도 꺼리는 각박한 요즈음,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이 인간들이 그리는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지식, 즉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저 따뜻한 열린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 마음으로 생각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생각의 틀이란 세계관이다. 세계관이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아니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잘 알게 해주는 것이 '인문정신'이다. 이것은 문학, 역사, 철학에서 다루는 영역이다. 이런 인문정신이 부족하면, 우리는 쉽게 정치적 판단을 한다. 예컨대,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안든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인 방식은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들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다. 그러한 이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보고 싶은대로 봐서도 안 되고, 세계를 봐야하는 대로 봐서도 안 된다. 인간적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다시 한번, 인간적으로, 매우 인간적으로. 이런 인문정신은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 부정적 사고, 열정 없는 꿈들을 막아주는 방패이기도 하다. 이런 방패는 사유하는 힘에서 나온다. 생각, 아니 사유하는 힘이 인문정신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힘은 '본능적 동작'이 아니라, '인위적(人爲的)인 활동력'이다. 사람은 인위적이고 의도적(意圖的)인 동작을 해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점점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본능적 동작'의 테두리에 갇힌 것이 동물이고, '인위적인 활동'으로 본능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에는 학습이 필요하고, 동물에게는 학습이 거의 필요 없다. 누가 더 사람이 되느냐 하는 점은 누가 더 학습하느냐로 결정된다.

 

학습에서 ''자는 배울 학()자이다. 배운다는 것은 3 단계로 이루어진다. (1) 인류에게 유익하다고 인정되었지만, 내게는 생소한 학문을 접하는 배움 (2) 그 배운 것을 자신의 일부로, 습관으로 만들기 위한 연습 (3) 연습한 내용이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실행이다. 자신이 배웠지만,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인내와 반복을 동반한 연습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 속안에 자리 잡아, 자연스런 일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실생활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이며 가짜일 수밖에 없다. 교육은 답습이 아니라, 자신이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고 발휘하는 기회이다. 그리고 배움과 실천이 중요하다. 내가 배운 것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을 강제로 반복하여 자신의 중요한 일과로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하루의 스케줄에, 일주일의 중요한 행사로 도입해야 한다. 탁월한 무술인, 예술가, 운동 선수는 지겨운 행위를 인내하며 반복한 사람들이다. 그 인내하며 반복하는 연습은 신체의 근육뿐 아니라 정신적인, 심지어는 영적인 근육이 되어 자신을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변모시킨다.

 

공부는 좋은 책을 한 번 읽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을 매일매일 상기하고, 그 거룩한 자신에게 매일 당부의 말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은 매일 매일 자신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다. 학습이란 정보를 내적으로 형성시켜 내 삶의 변화를 꾀한다. information-in(, 내적으로)+formation(형성)-transformation(변화)이다. 학습이란 말은 "어린 새가 날개를 퍼드럭거려 스스로 날기를 연습한다." 그것도 100번 이상 연습한다. ''이 정보 습득이라면, ''은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이다. 이를 '공부'라고 한다.

 

학습의 전 과정에 철학을 담아 체계화한 한 것을 우리는 교육(敎育)이라고 한다. 사회가 작동하는 중심 톱니바퀴가 두 개 있으니 바로 정치와 교육이다. 이 중에서 사회 뿌리의 동력은 교육이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정치가 어떠한 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사회의 정치 수준과 일치한다. 그 사회의 정치가 어떠한 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사회의 교육이 어떠한 가라는 질문의 답과 아주 잘 맞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교육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는 교육이 천하지대본야(天下地大本也)라고 한다. 교육이 한 나라 백 년 후의 전망을 결정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 교육생으로 살아 간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그런데 교육무용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교육 방법에 대한 회의에서 빚어진 착각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과정을 다 마친 학생이라고 해서 모두 다 창의적이거나 도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교육을 받고도 창의적이거나 도전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람 답게 사는 능력을 배우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람이 교육을 받는 목적은 사람 답게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의''도전'은 변화 일으키는 행동인데, 사람은, 동물들과 달리, 문명(文明)을 건설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명(civilisation)은 인간이 한 모든 활동의 총체이다. 그리고 문명을 건설하는 활동을 문화(文化)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문화(culture)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해서 변화를 야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변화를 야기(惹起)하는 일이 자신에게서나 사회애서 가장 근본적인 활동성인 것이다.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존재이다. 그래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일을 가장 근본적인 사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정의가 내려지는 순간 인간은 두 개의 층위로 구별된다. (1) 누군가는 변화를 야기하고, (2) 누군가는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인다. 첫 번째 사람, 즉 문화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유롭다, 주체적이다, 독립적이다. 두 번째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종속적이다. 인간이 근본적인 의미를 잃지 않고 활동하면, 자유롭다-독립덕이다-주체적이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문화적 높이로 산다고 말한다.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하는 활동은 창의적 활동이 된다. 그래서 자유-독립 주체-창의는 같은 차원에서 하나로 모여 질 수밖에 없다.

 

이런 근본적인 활동성을 가진 인간들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활동성들이다.

- 대답하는 사람보다는 질문하는 사람이 된다.

- 종속적인 사람보다는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 패륜(悖倫)적인 사람보다는 윤리적인 사람이 된다

- 훈고하는 사람보다는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

- 따라하는 사람보다는 먼저 만드는(先導) 하는 사람이 된다.

- 비굴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 답습(踏襲)하는 사람보다는 도전하는 사람이 된다.

 

교육의 관건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변화를 야기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지식에 매몰되거나 이념에 빠져 있으면 변화가 힘들다. 알고 있는 것을 수호하거나,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만 세상을 보며, 굳은 신명이 된 이념을 매개로만 세상과 관계한다면 변화는 경험할 수 없다. 이러면, 자신도 변화를 경험할 수 없지만, 세상에 변화를 야기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자전거에 대하여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알고 있는 것들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라는 것이 교육 문법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육을 받고도 교육받기 전하고 똑같다면 교육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지식의 습득이나 축적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교육 환경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을 축적한 다음의 인격적인 변화 혹은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독립적안 인격이나 창의력이나 행복이나 자유나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3인칭의 시점에서는 변화를 이야기하고 창의력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1인칭 시점에서는 변화나 창의력에 집중하지 못한다. 변화에 대해서 토론하고 의견을 말하지만, 정작 자신 내부에서의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대신에 알고 있는 것이나 믿고 있는 것을 강하게 지키는 일을 더 잘한다.

 

문명은 세 개의 층위로 이루어진다. (1) 가장 낮은 층위를 이루는 것이 물건들이다. 물건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로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물건은 물건 자체의 역량으로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2) 두 번째 층위가 제도이다. 물건이 나오고 돌아다니는 길을 제도라 한다. 물건은 태어나는 길과 돌아다니는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좋은 물건이 나온다. 이 제도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좋은 제도는 =좋은 물건이 등장하도록 보장한다. (3) 세 번쩨 층위가 좋은 철학이다. 이 철학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고도 한다. 좋은 제도는 좋은 물건이 나오게 하는데, 좋은 제도는 또 좋은 세계관이나 생각의 방식, 즉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서 비롯된다. 인문학은 추상적이다. 좋은 철학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종합하면, 구체적인 일상의 삶은 좋은 물건으로 보장되고, 구체적인 좋은 물건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좋은 제도가 만들며, 좋은 물건들과 좋은 제도는 추상적인 좋은 인문정신인 철학이 책임진다.

 

한 사회의 구성원둘의 시선이 물건에만 가 있으면, 후진국, 물건과 제도에 가 있으면 중진국, 물건과 제도와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 모두 가 있으면 선진국이다. 우린 아직 중진국이다. 우리 사호의 격렬한 논재들을 보면 아직도 제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의식도 매우 제도 의존적이다. 이를테면,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싶은 방향은 이런데, 교육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간다고 하는 말이나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데 내 삶이 사회구조 때문에 이리 되었다고 하는 한탄들도 결국은 모두 제도에 깊이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교육문제는 너무 심각해서 따로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교육은 자신과 사회를 독립적으로 잭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가 당연히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입시 제도에 함몰되어 있다. 고등학교라는 제도에서 대학이라는 제도로 이동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대학이나 고등학교라는 제도를 이용해서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나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옆으로 밀펴져 있다. 교육 현장의 황폐화는 교육의 정심과 철학이 사라지고, 제도를 지키려는 종속적 습관에 비롯된다.

 

우리가 아직까지 중진국인 이유는 우리 사유의 높이가 제도까지는 도달했으나 문화나 철학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종속적인 단계로는 가장 높지만 자유롭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직 우리는 문화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구체적 구성물인 물건과 제도 모두 외부에서 들여왔다. 독립적이기 보다는 종속적인 구조 속에서의 번영과 발전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새로운 도전은 매우 분명하다.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다.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다. 정치적이고 감성적인 독립이 아니라 삶의 독립, 생각의 독립, 과학적이고 찰학적인 높이의 독립이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도전에 나서지 않는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 문명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것이며, 이런 문명을 쌓는 인간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인공과 조작을 거부하고, 그냥 아무렇게 하거나 내버려 두는 것을 자연이라고 하면서 높은 차원의 것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있는데, 이는 인간적이라기 보다는 패배적인 자세일 뿐이다. 문명을 건설하는 사명을 가진 인간에게 자연적이라는 말은 인위와 조작적 활동의 결과를 원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경지까지 끌어오린 것이지, 인위와 조작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인간적인 삶은 무엇을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있었던 곳에서 없던 곳으로, 아직 경험된 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의미에 닿아 있는 인간이라면 머무르지 않는다. 내 지금의 생각,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부정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은 "혁명의 깃발을 완장으로 바꾸지 않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도의 높이에서 멈춘 상태를 넘어서서 삶의 태도와 관점의 혁신을 감행해야 한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과 과학과 문화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다. 시선을 높이는 도전을 하여야 한다. 국가적인 문제에서,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 신화는 물건과 제도의 높이에서 이룬 발전이다. 후진국과 중진국 정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성공 신화를 뒤로 물리치고 한 단계 더 노폭 새로운 신화를 쓰고 만들어 한다.

 

아직도 건국이니, 산업화니, 민주화니 하는 수준에서 이야기와 주장을 계속 하고 있다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인간적이지 않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자랑하겠지만, 인간으로는 미성숙 상태에 있다. 깃발을 완장으로 바꿔 차고,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사소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 가운데 한명으로 있는 한, 교육의 효과는 없다. 우리로 있으면서 번잡한 문제들에 휩싸여 있으면 나는 나로 존재하지 못한다. 오직 나로 존재하는 사람에게만, 교육 후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는 오직 나로만 존재하는 사람에게, 독립적 주체에게만 일어난다. 그래서 교육의 최종 단계는 독립적 주체 만들기이다.

 

독립적 주체가 되려면,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사람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본이다." 최진석 교수가 쓴 글에서 만난 문장이다. 누구나 기본만 갖추고 있으면, 세속적인 일에서나 영적인 일에서나 모든 일을 잘 이룰 수 있다.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기본 가운데 기본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 질문은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려는 문을 열어준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옆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져야 한다.

 

-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번잡한 일들로 포위된 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질문에 골똘히 빠질 수 있는 고독한 시간 자체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고독한 상태에서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고 스스로가 답을 찾아 자신의 존재적 목적을 찾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일들이 가능해진다. 그래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 성립된다. 자신을 성찰하는 고독이 동반되지 않는 교육은 성공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고독을 생산하는 수고와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 고독한 시간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소한 것들을 일거에 소멸시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남길 수 있는 시간이다. 독립적 주체로 성장시키는 특효약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천박한 물신주의와 인간의 가치를 인격이 아닌 기능에서 찾으려 하는 비인간화라는 시대적 질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의 약은 '인문정신', 즉 인문적 가치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그 역할이 인문운동가이다.

 

인문 정신이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균형 잡힌 역사의식, 온고지신의 지혜로움, 관용과 책임 있는 공동체 의식이다.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가능이 아니라 가치이다. 인문이라는 말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뜻인데, 인간다움, 인간이 인간 답게 그리는 무늬를 뜻한다. 라틴어로는 후마니타스(Humanitas)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자각, 아니 사람됨의 깨달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대 경쟁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작동 기제가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이다. 올림픽에서 외치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를 찾거나, 더 높은 성공의 열차에 타려고 발버둥친다. 과학 기술도 기하급수적인 속도 빨라지고 있다. 기업들은 더 먼 데까지 새 물건을 갖고 달려가기 위해 경쟁한다.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올림픽 정신과 그 반대에 있다.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노력이다. 그러니까 인문정신은 소외된 자리를 향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낮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고, 느긋하게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일이고, 세계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친화력이다.

 

이런 인문정신이 사회에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선진 사회가 된다. 그러니까 선진사회는 선진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선진문화는 인문정신이 밑에 배어 있어야 한다. 산업화니 민주화는 선진사회를 위한 전제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후마니타스, 즉 인문학은 사람의 학문이다. 사람이 뭡니까? 사람은 homo sapiens이고, homo faber, homo ludens이고 동시에 homo loquens, homo sexcus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이며, 뭔가를 끊임없이 만드는 사람이며, 쉼 없이 놀이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말하는 사람이면서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입니다. 인문학은 이 모든 문제를 다 다룹니다. 이 모든 것이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끊임없이 형성되는 존재이지 결코 완성되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Be가 아니라 Being인 것입니다. 인문학은 이런 사람을 사람 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게 만드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인문학의 힘은 사람을 사람 답게 만드는 힘입니다.

 

인문 정신이란 전진하는 분석후퇴하는 종합’, 즉 통찰하는 정신입니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총체적으로 모두 훑어 두루 살펴보는 것입니다. 인문 정신은 우리의 삶과 세상을 잘 볼 줄 알게 해줍니다. 통찰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insight, penetration이고 overview이고, 한문으로는 洞察이면서 通察입니다. 이러한 통찰의 힘을 기르는데 최고의 자양분이 인문학, 후마니타스(humanitas)입니다. 진정한 통찰의 힘은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비정신이 인문 정신입니다. 인문학은 , , 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장은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입니다. 사는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하고 나아갈 바를 살피는 것입니다. 표폄(褒貶, 시비선악을 판단 결정하는 것)이다. 철학은 관념의 퇴적이나 사념의 유희가 아니라 깊은 생각과 넓은 조망을 통해 삶의 진정한 원리를 발견해가는 살아 있는 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박제화된 관념의 집합이 아니라 삶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혼(정신)의 운동입니다. 살아있는 인문학 정신이란 영혼을 불사르며 끝까지 쓰러지지 않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의 주제는 우리들의 욕망, 감각, 꿈입니다.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자유로운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이다. 교양인이 되는 목적은 교양인으로서 삶을 충실히 살아서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적 단계로 승화시키기 위해서이다. 교양인은 교양을 갖춘 사람이고, 자신이 갖춘 교양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여기서 교양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걸 보통 자유기술(Liberal arts) 또는 인문학(Humanities)라 한다. Humanities15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이 썼던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에서 찾을 것이다. 인문학의 기본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paideia)에서 왔다.

 

'파이데이아'는 기원전 5세기 중엽에 나타난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폴리스(도시국가)의 리더로 키우기 위해서 행하던 교육과정이다. 그리스 사회는 자유민과 노예라는 확실히 구분되는 신분제 사회였다. 그 사회에서 리더는 자유인으로 불리는 '능동적 시민'을 말했다. 피지배 계급으로서 자유가 없던 수동적인 노예들을 선도하고 끌고 나아가던 지배 계급이다. 자유인들이 지시하고, 노예들은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자유민들은 이끌고, 노예들은 따라간다. 교양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잉태되어 자유인으로서 능동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고안된 교육 장치였던 것이다. 교양은 얼마나 많은 사실을 아는가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와 같이 방향성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진다.

 

-제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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