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세종포럼 인문학 특강-박한표(인문운동가)-제2부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1-07-02 09: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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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시대적 가치-왜 인문학인가?]
2. 제2부 인문학의 시대적 가치 -그리스 정신과 인문학

 

인문학의 시대적 가치-왜 인문학인가?

 

인문운동가 박한표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2부 인문학의 시대적 가치

                -그리스 정신과 인문학

 

그리스 로마 신화가 바탕을 이루는 헬레니즘은 인간중심주의, 현실주의 그리고 합리주의가 특징이다. 우리는 이걸 '그리스 정신'이라고 한다. 이 그리스 정신이 인문정신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리스 정신을 알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네 명의 인물과 함께 살펴 보라고 했다.

1. 호메로스가 말하는 삶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 찬미: 살아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 죽음보다 고귀하다.

2. 소크라테스의 사유 방법: 숙고(熟考)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3.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 추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4. 알렉산드로스의 꿈: 인류의 문명을 위한 갈망과 사랑을 통해 이웃에 대한 관심을 실천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에 대해, 인간의 삶에 대해 그리고 주어진 생명에 대해 긍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호메로스의 작품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일리아스오딧세이아, 두개의 작품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대 이집트를 통해 문명을 전수받았다. 분명히 "빛은 동방으로 부터" 왔다. 그런데 '동방의 빛'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삶보다 죽음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 이집트 문명을 생()의 찬미와 인간과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었다. 오딧세이아에서, 아킬레우스는 저승 세계의 강력한 통치자로 군림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오디세우스에게 "죽은 이들의 통치자가 되느니 산 사람의 머슴이 되는 게 낫다'고 토로하는 장면이 이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의 속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유는 지중해 연안에 출몰하던 페니키아인들, 즉 해상 세력의 영향으로 본다.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을 보아도 우리는 삶과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정교한 고대 그리스의 작품을 보고, 단순히 조각한 장인들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읽으면 안 된다. 그 작품 속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 사랑과 욕망에 대한 성찰이 있었음을 우리는 감지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 정신을 잘 이해한 작가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이다. 나도 그의 소설을 아주 좋아한다. 고대 그리스 정신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이상하다'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에서 삶을 긍정하고 인생을 찬미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조르바에게 인생은 한바탕 추는 춤이다. 그에게 춤이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일단 술 한잔 마시라고 권한다. 그리고 함께 들이킨다음, 자신이 나가서 춤을 출 테니 보라고 한다. 춤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춤을 추는 것이다.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관념 속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춤추고 있는 자기 인생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이게 인생을 긍정하고 삶을 찬미하는 그리스인의 정신이다.

 

그리스가 두 번째로 남긴 인문학적 유산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숙고하는 삶'이다. 숙고(熟考)'곰곰이 생각함, 깊이 고려함'이란 의미이다. 깊이 생각하고, 오래도록 고찰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들어간다. '깊고, 길게' '검토하는 것'이다. 한문으로 '()'자가 '익다'라는 말이고, ()'곰곰이, 오래 생각한다.'란 말이다. 그래 어떤 사람들은 숙고하는 삶이란 말 대신 검토하는 삶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The Unexan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라고 말했다. 좀 더 자세하게 인용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언제나 탁월함에 대해 논하고, 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 인간이란

? 늘 탁월함을 생각하고,

? 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숙고하는 삶이란 다시 말하면 성찰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탁월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탁월함이라는 말이 탁 와 닿지 않는다. 최진석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높은 시선을 지닌다'는 것 같다.

 

'탁월(卓越)하다''남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나다'로 사전은 정의한다. 탁월함을 동양적 사유로 말하면, ()이다. 내가 알기로 ''은 도()가 실제 삶에 구현된 것이다. 이를 그리스어로는 아레테(arrete)라고 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최대로 발현된 것을 아레테, 탁월함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탁월함은 그냥 아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각각에게 해당되는

? 짜임새 있는 배열(taxis)-질서

? 올바름(orthotes)

? 기술(techne)을 통해서 탁월해진다고 한다.

 

탁월함에 왜 질서가 필요한가? 질서에서 절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탁월함은 절제에서 나온다. 좋음(훌륭함)과 탁월함()은 다르다. 탁월함은 'GRIT'에서 나온다. '그리트'란 열정적 끈기의 힘(투지와 기개)에서 나온다. GRITdetermination and courage(결단력과 용기)이다. 재능보다 노력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공식으로 표현한다. 성취=재능X노력의 제곱이다.

 

아레테는 어떤 종류의 탁월성 혹은 도덕적 미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이해하면 된다.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는 참된 목적이나 개인의 잠재된 가능성의 실현과 관계된 최상의 우수성을 가리킨다.

 

그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숙고의 대상은 무엇인가?

 

? 그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델포이에 신탁을 받으러 갔다가 탈레스의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라는 격언을 보았다. 그는 이 격언을 통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성찰하겠다는 삶의 자세를 다짐한다.

 

? 그리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숙고하지 않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인문정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그리고 그 질문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나라면,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의 답은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배우는 자세가 생기고, 죽을 때까지 숙고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숙고하는 삶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 "너 자신을 알라!" 쉽지 않다. 방심(放心)하면, 관성으로 삶이 훌쩍 흘러간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을 묻지 않으면, 우린 자꾸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고 눈치를 보게 된다. 그 질문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인정받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향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질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질문을 한 다음에는 그 대답을 모색하는 경험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모색하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래 늘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배우는 것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적 성장이다. 인생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실제 배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부 구경만 한다. 배움은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익힘'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익힘'은 그것을 다룰 수 있도록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강의를 듣거나 누군가로부터 배우면, 그 배운 것을 글로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익힘'을 반복하면 '나만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두고 '자유(自由)'라고 불렀다. 그러니 배움의 목적은 결국 '자유'를 위해서이다. 사실 자유는 그냥 주워지지 않는다. 내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배워 법칙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면, 그 때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자유로운 나'는 누구인가를 쉼 없이 또 성찰해야 한다. ? 뭐 좀 할 줄 안다면, 우리 인간은 오만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네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진짜 무지'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 지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알고 무리하지 않으며, 나를 배려하고 나를 돕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곧 지혜를 뜻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절제를 할 수 있다. 즉 멈출 줄 알고, 현실을 잘 직시하고, 무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제의 한도 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그만큼만 활용한다.

 

그러다 보니, 지혜롭고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배우고자 한다. 그리고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용기 있는 사람이다.

 

세 번째로 플라톤과 함께 한다. 우리는 그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배운다. "반짝인다고 모든 것이 금은 아니다"가 플라톤 사상 체계이다. 보이는 것 너머에 어떤 초월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의 원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저작이 국가론Politeia)이다. 이 책을 한 줄로 말하면,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일을 함이 올바름이다." 이 올바름을 정의로 말할 수도 있다. 그에 따르면, '정의'란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은 아테네가 아니라, 스파르타였다. 그에 의하면, 이상적인 국가는 스파르타에서처럼 군주, 즉 통치자가 늘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가 수호자는 용기가 필요하고, 국민은 절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렇게 통치자와 수호자와 국민이 각각의 위치를 지키고 저마다 갖춰야 할 덕목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한 국가의 '올바름'이고,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 플라톤 국가론이다.

 

이 국가론은 '바른 나'를 위해서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덕목으로 확대된다. 이는 곧 본질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이상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그는국가론에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각고 끝에 아주 고뇌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고뇌의 끝에 보게 되는 것이 신의 이데아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게 '진선미(眞善美)'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 이데아가 가시적인 영역에서 빛(이성)을 낳고, 지성과 진리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진선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우리가 고뇌 끝에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그 이데아의 세계를 늘 생각하고 추구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반짝인다고 전부 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우리는 잘 읽어야 한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묶인 채로 진실이 아닌 허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에 의문을 품고 자신을 속박했던 족쇄를 부순다. 그리고 동굴 밖에 있는 태양을 향해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오지만, 태양을 보지 못한다. 눈부신 태양을 볼 용기가 없어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이게 보통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한 채 반짝이는 것을 그냥 금이라고 믿는 것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을까?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그 용기는 어떻게 생길까? 갈망을 통해서이다. 진정으로 원하고 갈망하면, 우리는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게 그리스 인문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 갈망은 '에로스'를 통해 발현된다. 여기서 에로스라는 말을 번역하면, '숭고한 사랑'이다. 에로스라는 말을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는 좀 다르다. 타자에 대한 숭고한 사랑이다. 숭고(崇高)"뜻이 높고, 고상하다"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플라톤 동굴의 비유는 이데아를 향한 갈망을 통해서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만약 여기서 그치면 플라톤의 사상은 단순한 용기에 대한 덕목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데아를 한 번 본 사람에게 '에로스'가 깃들어 숭고한 사랑의 감정이 생기면, 동굴 안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환영을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게 이데아의 힘이다. 자기만 이데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은 갈망과 에로스(숭고한 사랑)가 생기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숭고한 사랑의 감정으로 동굴 안의 쇠사슬에 묶인 채 그림자를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을 생각하는 것이 이데아의 힘이고, 이 힘으로 욕을 먹더라도 그들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힘이 에로스(사랑)인 것이다. 에로스 힘의 작동은 내가 이데아를 보려는 용기를 심어주고, 다시 동굴 안의 사람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힘이다. 이게 플라톤의 에로스론이다.

 

당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를 죽인다. 어떻게? 소크라테스는 다수결원칙을 선이라고 착각하는 왜곡된 민주주의인 중우정치(衆愚政治, 이성보다 일시적 충동에 의하여 좌우되는 어리석은 대중들의 정치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 민주 정치의 타락한 형태를 이르던 말로서 민주 정치를 멸시하는 뜻)와 인기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법정에서 독배를 마시고 순교 당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용기(勇氣)라고 착각하고, 그런 집단행동을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발판이라고 호도(糊塗, 풀을 바른다는 뜻으로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린다는 뜻)한다.

 

따라서 지중해 인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대신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한다. 그 때 등장한 인물이 마케도니아 출신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나를 평화롭게 하는 통찰을 얻었다.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인 "세오리아(theoria)"를 통해 그 대상에 대한 가치가 측정된다는 것이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는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서 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것이고, 만일 B가 착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길 힘쓰고 선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인 것이다."(배철현)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선한 사람은 선한 부분이 51%이고 악한 부분이 49%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과 사람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관조(觀照)하는 힘이 생겼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우리는 '관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인간 삶의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어로 쎄오리아라고 부르는데 이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theory'는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이론이란 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인내하며 볼 때 슬그머니 자신의 속 모습을 드러내는 그 어떤 것이다. 이론이란 고착된 편견이나 굳어진 도그마가 아니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 어울리는 생각, , 행동을 '중용(中庸)'이라고 말한다. 그 반대가 "무절제(無節制)'이다. 무절제를 글자 그대로 하면, ‘절제하지 못하는 무기력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죄다. 인간은 교육과 훈련, 그리고 스스로의 수련을 통해 짐승의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 개화된 인간, 승화된 인간, 혹은 신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인간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선은 중용이고, 악은 모자람과 과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품격의 원칙은 중용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 혹은 중용이 부족하거나 과도한 상태를 무절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인 제자인 알렉산더는 기원전 3세기에 자신이 정복한 속국들을 하나의 문화로 통일하고 싶어 했다. 그 문화를 우리는 헬레니즘이라 부른다. 헬레니즘은 무엇보다도 그리스어를 국제공용어로 통용하고, 그리스 사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제국의 바탕으로 강요하였다. 내가 추구하는 인문정신은 고대 그리스 정신에서 나왔다. 여기서 인문 정신이란 자기성찰에서 시작하여,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갈망과 에로스의 사랑을 통해 이웃에 대한 관심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 알렉산드로스이다. 그는 "함께 살기 위해 세상 끝까지 라도 가서 문명을 전하겠다고"고 결심한다. 그는 한 세계, 오이쿠메네(Oikumene)*를 꿈꾸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꿈, 그것은 인류의 문명을 위한 갈망이었다. 갈망(渴望)을 다른 말로 하면, 간절함이다. 갈망의 사전적 정의는 '간절히 바람'이다. 영어 desire이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찻듯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신의 부름을 받은 자로 자신은 신의 뜻을 실천하는 존재라고 믿고, 더 많은 권력을 잡기 위해 넓은 세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쇠사슬에 묶여 있는 페르시아와 인도의 이웃들에게 진리의 세계, 참된 이데아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의 땅을 정복한 뒤에도 그 지역의 종교나 문화를 파괴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별명이 '두 개의 뿔이 달린 영웅"이었다. 동양과 서양을 동시에 통일한 인물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헬레니즘'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잔인한 폭력자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고대 그리스가 쇠퇴한 이유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플라톤이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던 스파르타는 배타적인 국가였기 때문이다. 약자를 배타시하고, 타자를 괴물로 취급하는 사회는 점점 더 폐쇄적인 사회로 굳어진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이데아가 결정적이라 거나 최종적이다 또는 유일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배타적인 독선이 되고 만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주장에 따르면, 플라톤의 사상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폐쇄적인 사회에 대한 이상적 관점은 우리 사회를 쇠퇴의 국면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래서 로마의 초기 지도자들은 그리스의 위대한 정신은 계승하되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다시 말하면, 고대 그리스 인문 정신은 따라가되 배타성을 경계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로마는 끊임없이 도로를 건설했다. 이건 로마인들이 세계와의 소통, 개방성을 추구했다는 뜻이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은 북방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 벽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 주지면, 동시에 그 벽 때문에 열린 사회가 되지 못한다.

 

인문 정신이란 개방적인 사회,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약자와 타자를 존중하는 정신이다. 그리스인들은 지식의 향연이란 '심포지엄(symposium)'을 즐겼다. 이 말은 '함께'라는 sym''이라는 posium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그 뜻은 '함께 마시자'는 뜻이다. 그런데 로마 인들은 그 심포지엄을 콘비비오(convivio)로 번역하였다. '함께'라는 con'살자'라는 vivio의 합성어로, '함께 살자'라는 뜻이다. 그리스 사회에서는 지혜의 향연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었다면, 로마에서는 함께 살자라는 정신으로 바뀐 것이다.

 

호메로스를 통해 인생을 긍정하고 삶을 찬미하는 자세, 소크라테스를 통해 숙고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플라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를 통해 세상으로 나가 큰 뜻을 품고 이 세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 네 개의 정신을 한 단어로 '아레테(arete)'**라고 한다. 이건 한마디로 말하면, '탁월함'이다. 각자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인들은 '자유'라고 했다. 사실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배워 법칙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면, 그 때 나는 자유롭다.

 

제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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