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예술여행으로 만나는 러시아 문화’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1-11-21 05: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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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세종포럼 제7차 초청세미나
[1]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와의 만남
[2]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하여…
[3] 닥터 지바고의 페레델키노 역
[4] “수즈달(Суздаль)에서는 넘쳐도 해가 되지 않는다.”
[5] ‘백만 송이 장미의 나라’ 라트비아

 

 

 ‘문학 예술여행으로 만나는 러시아 문화’

     2021.10.21.(목요일)


발제 : 전상규(러시아·유럽 문화교육원 원장)

토론 : 김영호(미디어시시비비 편집국장)

 

사회 : 안재휘(세종포럼 총무)

 

 

[1]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와의 만남

[2]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하여

[3] 닥터 지바고의 페레델키노 역

[4] “수즈달(Суздаль)에서는 넘쳐도 해가 되지 않는다.”

[5] ‘백만 송이 장미의 나라라트비아

 

 

▲ 톨스토이 무덤

 

[1]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와의 만남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나름의 이유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안나 카레니나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이 유명한 구절은 이제 마치 격언과도 같은 말이 되었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태어난 인물만도 안나와 브론스키에서 부터 아마 수천 명이나 될 것 같다. 세계사에서 가장 많은 다작에서부터 대작을 창작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해서 많은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소설가이면서 사회계몽과 농촌문제 더불어 청년교육에까지 진보적 생각과 실천으로 인해 정부 지도층으로 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다. 심지어 진실한 종교가 무엇인가 진정한 신앙은 무엇인가에서 부터 종교의 가치는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그리고 신의 왕국은 그대들 안에 있다고 설파하면서 민중들을 위한 인간을 위한 종교를 추구하면서 더러 금기시 되어왔던 내용의 종교문제까지 언급하여 러시아 정교로부터 지금까지 파문을 당하기까지 했다. 생전에 출세작으로서 대작인 소설 전쟁과 평화그리고 안나카레니나등의 출판을 통해서 벌어들인 막대한 인쇄료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상속받은 거대한 영지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합쳐 생전에 경제적 부족함이 없이 풍요롭게 살았던 작가이기도 했다. 여러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도 살아생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많은 여행을 통해서 자신의 글 소재를 유럽적인 규모와 분위기로 잘 풀어낸 흔적들을 곳곳에서 볼 수 가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많았던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러시아인들은 작품만으로 비교 평가할 때 유럽적인 톨스토이와 러시아적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자주 비교하기도 한다. 또 그다지 많은 작품을 쓰지 않았던 파스테르나크8년에 걸친 집필과정 끝에 닥터지바고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데 비해서 톨스토이는 다작의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고서도 노벨문학상을 받지는 못했던 작가였다. 하지만 수상자 이상으로 존경을 받아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그 당시 기대수명이 그다지 길지 않았던 시대에 파스터르나크70세까지 오래 살았던 것에 비하면 톨스토이는 무려 82세까지 장수했던 작가이기도 했다. 심지어 말년에는 장티푸스와 폐렴으로 고생도 하였지만 병마에서 잘 극복했고, 그때 문병으로 자주 찾아왔던 당대 유명작가 체호프고르끼를 반갑게 맟아주기까지 했다. 불행히도 출판에 따른 인쇄료와 재산상속분배문제 등으로 가족들과의 불화로 집을 나간 3일 후 철로 역에서 마지막 삶을 객사하게 된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서 그의 소설이란 더러 읽어 보기도 전에 책의 두툼한 부피와 상하 2권으로 나누어진 분량으로 인해서 독자들을 겁에 질리게까지 한다. 책 속에서 묘사되는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면밀한 심리묘사는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이해력을 돕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결론을 성급하게 알고 싶은 독지들에게는 끝까지 읽어갈 인내의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쿠르스키역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반이면 툴라역에 이르게 된다. 거기에서 버스 편으로 이십여 분이면 그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야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주 시골스런 농촌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톨스토이 영지 정문을 마주보게 된다. 모스크바 외곽의 극심한 교통체증을 고려해서 버스 편보다는 기차가 더 빠르고도 편한 교통수단임을 알고 나서부터는 나는 혼자서나 또는 제자들과 지인분들과의 근교로 여행할 때는 기차를 더 자주 이용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가는 도중에 하늘을 덮고 있는 구름 구경 또한 장관이다. 사실 러시아 하늘에 구름이 그렇게 낮고 예쁘게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때는 여름철밖에 없다. 거기다가 백야가 함께 한다. 가장됨 하나 없이 흰색과 푸른색 덩어리들이 송이송이 머리 위에 손이 닿을 듯이 가까이 내려와 춤추듯 넘실거린다. 이날도 꽤나 무더운 8월 더위가 아침부터 찾아와서 영지 내를 장시간 걸어 다니며 탐방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지 내에 숲들이 울창한 부분은 그늘이 져서 상쾌히 걷는 맛을 더해주었지만 넓은 들판으로 나오면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전형적인 모스크바 근교의 여름으로 볕이 따갑기 그지없었다. 더욱이 넓게 펼쳐진 영지 내 하늘은 낮게 드리워진 구름들만이 덩어리를 이루면서 어디론가 열심히 떠다니고 있었다. 입장권을 구입해서 들어오면 초입에 축구장 반쪽만 한 호수 같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는 높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지친 관광객들에서 쉼터를 제공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영지 내 규모는 생각보다 엄청 큰 규모였다. 큰 가로수를 양쪽에 두고 길게 늘어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사과밭이 나오고 그 옆을 지나면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아마 생전에 작가는 애마도 아닌 고가의 경주마를 즐겨 이용했기에 상징적으로 키우는 것 같아 보였다. 그곳에서부터 작가가 생활하던 공간들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서너 동의 건물들이 아담한 규모로 관광객들에게 생전에 작가가 살아왔던 모습들을 볼 수 있게 재현해 두었다. 특히 내게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우측 길을 지나서 나타난 예쁘게 단장된 화단이었다. 그곳에는 평소 각종 꽃을 가꾸길 좋아했던 작가의 일종의 텃밭인 셈이었다.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잘 가꾸어져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작가의 쉼터도 한쪽에 잘 조성되어 있었고 글을 쓰면서 사색과 휴식의 공간으로 잘 활용한 모습들이 엿보였다. 그리고 다시 숲길을 벗어나 왼쪽 길을 따라서 한참 지나오면 막다른 길목에서 마주하게 되는 무덤이 나타난다. 그의 영지 끝자락에 자리한 한 평 남짓한 무덤에는 그냥 흙으로 봉을 한 무덤밖에는 없다. 그 흔한 주검의 주인공에 관한 알만한 표지석 하나 없다. 평소에 사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생전의 유언에 따른 것이기에 그저 그의 영지에 있는 무덤 하나를 당연히 그의 무덤으로 알고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방문객이 그의 무덤 주변에 꽃을 두고 경의를 표한다. 겨울이 오면 하얀 눈으로 덮이고 여름이면 잔풀로 덮여있어서 기대했던 대문호의 무덤답지 않게 그냥 작은 봉우리처럼 보일 뿐이다. 보고 또 한 번 확인해 보면서도 놀랄 뿐이다. 살아생전 남이 누리지 못했던 흔히 부귀영화를 모두 누리며 살았던 대문호가 사후 고작 한 평의 땅속에 그것도 표지석 하나 세워둔 것 없이 흙무덤 속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무덤에서 되돌아 나와 좌측 아랫길을 따라서 내려가다 보면 숲길이 끝나자마자 넓은 들판이 나온다. 끝이 희미하게 보일정도의 넓은 들판에 옥수수가 심어져서 곧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해 보였다. 영지 뒤쪽에 펼쳐진 이곳을 보고서야 그의 영지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가 있었다. 영지의 규모에서도 놀랐지만, 인상적인 것은 영지 초입에서부터 톨스토이 무덤이 있는 끝자락까지 방향과 위치를 알려주는 기둥에 붙여놓은 모든 이정표에는 러시아어 영어 그리고 한국어가 나란히 함께 붙어있었다는 사실이다. 7, 80년대 톨스토이는 우리에게도 몇몇 그의 소설로서 유명세를 떨치던 때라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꽤 많이 이곳을 방문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 영지에서 작가는 추운 겨울을 빼고 좋은 계절에 머물면서 창작에 몰두했고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산책도 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많은 문인과 음악인 그리고 화가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많은 대화도 나누었다. 생전에 남긴 많은 작가와 관련된 사진과 초상화 그리고 가족들과의 화목한 풀밭에서 함께하는 만찬에 모습들은 모두 이곳 영지에서의 모습들이었다. 또한 그 당시에 주변에 많은 마을 농로들이 가난으로 방랑과 굶주림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수많은 급식소를 만들어 지원해 주기까지 했다.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모스크바로 옮겨와서 지금에 박물관으로 개조가 된 저택에 머물면서 문인 체호프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 예술인가 음악인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아마 이때 찾아온 화가 중에 일리아레삔이 그린 그의 초상화가 러시아 곳곳에 있는 많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보게 되는 대표적인 톨스토이 초상화인 것 같다.

우리는 다시 한번 톨스토이의 삶을 통해서 그의 불행과 행복들을 보면서, 소설 안나카레니나속에서 주인공 레빈의 행복은 안나의 불행보다 오히려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해 보이는 이유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 속 안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내 안에 다른 내가 있죠.

그 다른 내가 무서워요.

그 다른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고

그래서

난 당신을 증오하려고 했죠‘.

 

 

▲ 도스토에프스키 무덤

 

[2]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하여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나름의 이유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대문호라 칭하는 러시아 톨스토이 작가가 쓴 안나카레니나소설 첫 부분에 나오는 글이다. 일생을 풍요롭게 살았고 물려받은 재산뿐만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란 장편소설로 거금을 벌어들인 그는 현대사에서 보기 어려운 재벌 작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그와 늘 비교 평가받는 도스토예프스키는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그와는 너무 다르게 극과 극의 삶을 살았다. 평생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써서 팔아야만 했다. 게다가 언제나 원고 마감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톨스토이를 서구적이면서도 유럽적 인물로 러시아인 정서보다는 다소 이방인의 작가로 평가하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러시아적 작가로 평가하면서 톨스토이보다도 더 인간적인 애정과 함께 더 편애하는 것 같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접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지식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서적들을 통한 번역서였거나 또는 미국에서 들어온 자본주의적 관점에 시각을 두고 쓰인 서적들을 그대로 번역한 저작물들을 읽고 듣고 배운 것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방점을 정해놓고 써 내려갔다.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했던 삶과 만성적인 간질병으로부터 허덕이던 생활 모습, 도박에 있어서도 절제력을 상실한 광적인 표현, 주변인들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교류 관계 등등이 그러하다. 특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란 무엇인가란 저자 ‘EH 가 쓴 비평서에서도 작품에 대한 비평과 함께, 작가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부정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자본주의적 우월한 관점에서 소련 시대의 작가들을 폄하하는 듯한 흔적들을 글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작가의 작품세계, 작가의 성격과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 그의 일상생활에서 보여준 도벽이나 간질 그리고 죽음에 관한 더 정확한 사실들에 대해서 지금 시대에 맞게 더 객관적인 평가와 사실에 근거한 새로운 해석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최근 2000년대 들어와서부터 그의 부인 안나가 저술한 전기에 가까운 자전적인 글을 통해서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로서, 또한 위대한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새로운 평가들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자식들에 대한 그의 부성애와 부인 안나에 대한 섬세하고 끝없는 사랑, 가족들에 대한 끊임 없는 걱정과 형제들의 어려운 경제적인 상황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과 헌신적인 태도, 첫째 부인의 사생아를 돌보면서 겪는 갈등과 전처소생의 아이와 겪는 끝없는 충돌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들에서 우리는 작가에 대해 측은하고, 애처로운 심정을 느끼게 한다. 보통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별 차이 없는 남편으로서의 모습과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모습들을 엿보면서도, 우리는 위대한 작가의 이면의 숨어있는 보통의 모습들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첫 번째 아이를 출생 2년 만에 잃고 난 후 잊지 못해 여러 해 동안 매번 무덤을 찾아가는 작가의 모습이며, 그 후 태어난 아이가 잦은 잔병과 약간의 간질병의 증상을 보일 때 자신으로부터 유전된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모습들이 우리네 아버지 모습들과 별 차이 없어 보인다. 해외를 여행하면서 도박판에 돈을 잃고 어린 부인에게 돈을 보내 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이며, 눈에 보이는 맘에 드는 물건들을 부족한 살림살이에도 즉흥적으로 구매하는 철없는 행동, 어려운 상황에 빠진 형에 대한 경제적 책임감과 전처소생의 피하나 섞이지 않은 아들이 행하는 금전상의 요구를 매번 들어주면서 어린 부인과의 일상적인 다툼에 그가 보여주는 너그러운 이해심과 행동들은 평범한 우리들 행동과 사뭇 다르지 않다. 어려운 형편에 돈을 선불로 받고 써주기로 한 원고를 제때 마감하지 못해 쩔쩔매거나, 마감 원고를 제출하기 위해 찾아간 출판사 사장이 지연에 따른 배상을 받고자 하여 피해 다니는 상황에서 작가가 느끼는 무기력함을 부인에게 보이는 모습들도 애처롭기 그지없다. 죽음 앞에서 보여주는 아내에 대한 사랑 고백 같은 그의 절규는 두고두고 우리에게 회자된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행한 러시아 당대의 최고 시인인 푸쉬킨 동상제막식 연단에서 그가 읽어 내려간 자신의 제막식 연설의 위대함과 끝없는 작가들로부터의 찬사, 그리고 그가 죽은 후 알렉산드르스키 묘지에 묻히기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심 전체를 덮을 정도로 모여든 인파의 숫자로 보여준 도스토예프스키 작가를 위한 애도는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보여주는 모습들이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작가는 지나온 삶에서 겪은 파란만장했던 것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떠 올렸을까.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린 첫 아이를 그리워했을까 도박판에서 없는 돈을 탕진하고 어린 부인에게 애처롭게 자금을 부탁했던 때가 떠올랐을까, 아니면 원고료를 받기 위해 시간에 쫓기면서 글을 쓸 때가 떠올랐을까. 아니면 평생 간질에 고통받던 시절이 생각났을까 아니면 유배지에서 만났던 애 딸린 첫 번째 부인에 대한 원망과 슬픈 기억을 생각했을까. 기록으로나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사실은 평생을 의지하면서 작가에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했던 어린 부인 앞에 그가 떠나면서 남긴 유언과도 같은 이 한마디가 더 인간적인 작가였음을 보여준다.

 

기억해 줘,

내가 당신을 언제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걸.

그리고

꿈에서조차도 당신을 배반한 일이 없다는 걸 말이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의 세월이 지나고서야 2000년 초에 부인, ‘안나의 유골이 멀리 떨어져 있던 기존묘지에서 이장되어 사랑했던 남편의 무덤에 새롭게 합장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 상트페테스부르크 중심부에 위치한 넵스키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알렉산드르스키 기념묘지에는 지금도 매일 수 많은 사람이 방문하여 그들 무덤 앞에 꽃을 헌화하며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스부르크 넵스키 끝자락에 있는 리곱스까야 지역에는 그가 살았던 주택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작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가 부인과 자녀들이 살았던 한때의 모습들, 그가 사용했던 책상이며 옷가지들, 그리고 아내가 사용했던 세간살이들과 아이들을 위한 보잘것없는 놀이기구 들을 보면서 작가의 지난 삶이 얼마나 검소하다 못해 얼마나 궁핍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가 필체의 묵직한 원고 두께를 보면서 작가가 인류에게 남긴 문학 분야에서의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만일 네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를 보게 되리라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너 자신과 세상 전체를 사랑하게 되리라.

 

 

▲ 파스테르나크 박물관

 

 

▲ 파스테르나크 박물관 내부

 

 

[3] 닥터 지바고의 페레델키노 역

 

 

 

 

토냐

라라

닥터 지바고,

그리고 순백색의 설원.

저자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러시아의 대자연을 무대로 격동기 러시아의 정치와 역사를 세 명의 주요 인물을 통해서 8년간의 긴 노력 끝에 대작을 완성한다.

 

백설같이 뽀얀 눈이 내린 대설원 위에 큼직한 대저택 이층 창문을 통해서 얼어버린 유리창을 긁으면서 닥터 지바고가 간절히 애타게 쳐다본다. 눈에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넓은 눈으로 덮여있는 설원 끝자락을 떠나가는 라라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토냐라는 아내를 둔 남자,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생에 볼 수 없는 애인 라라를 떠나보내는 이 장면은 영화 닥터 지바고의 명장면인 것 같다. 온기 하나 없는 매서운 추위 속 방안에서 손가락이 나온 장갑을 끼고 시를 써가는 시인인 주인공 지바고의 모습 하며, 텃밭에서 감자를 수확하면서 옛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과, 지나가는 라라를 닮은 여자를 보고 기차에서 내려 찾아 헤매다가 쓰러져가는 마지막 장면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스키 기차역 뒤편에 교외선 완행을 타고 30분 정도를 달렸다. 이 기차에는 화장실이 없는 관계로 탑승 전에 적당한 볼일이 요구된다. 출발하고 곧이어서 중년의 나이든 아주머니께서 바구니를 이고 생활 도구를 팔기 위해서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지나간다. 연이어서 젊은 사내가 벨트와 지갑 그리고 테이블보를 팔기 위해서 지나간다. 이렇게 줄지어서 몇 차례 지나가고 나면 기차는 모스크바 중심부를 지나 자작나무가 줄지어서 지나가고 허름한 창고들이 빽빽한 지역을 지나면서 교외로 접어든다. 그리고 나면 겨울을 나기 힘들어 보이는 나무로 지은 주택들이 간간이 지나가고, 그 틈에 멀리서 러시아다운 화려하고 예쁜 금빛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 교외를 지나다 보면 어느 곳이나 비슷한 풍경을 보게 된다. 페레델키노를 가는 여정도 사뭇 다르지 않다. 정작 교외라고 생각하고 와 본 페레델키노 기차역은 시골스러운 교외가 아니라 지방 소도시 같은 인상을 준다. 철길 건너편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끝없이 줄지어 들어와 있고, 아직도 40층 규모로 짐작되는 건설 중인 아파트도 눈에 들어온다. 철길을 사이에 두고 좁은 갓길을 따라서 20분 남짓 걷다가 보면 오른편에 적잖은 크기의 화려한 성당이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와 자작나무로 작은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마을 어귀에 보이는 작고 아담한 묘지를 바로 곁에 두고 지나가다 보면 우리 정서에 무서움에 소름이 돋기도 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이런 모습들은 아주 친근하면서도 가족과 친지 같은 친밀감을 주는 문화의 일환인 듯하다. 굽어지는 도로를 따라서 작은 개울이 지나간다. 개울 양쪽 사이에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영역은 아닌 뜻 해 보인다. 막 개울을 지나 작은 동네 초입이 나타난다. 이곳이 예술인촌이다. 1800년 중·후반부터 가난했던 예술인들이 모여 부락을 이루고 살았던 당대에 유명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을 떠나고 손꼽아 헤아릴 만큼 몇 안 되게 남아있다. 지나간 세월만큼 숲이 빼곡하게 우거져서 발길이 없는 곳은 지나갈 수가 없이 오래된 장소임을 보여준다. 한가운데는 3층짜리 초라한 작은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한때 예술 분야에 이름을 알렸던 작가들이 모여 토론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리에레삔 림스키코르샤코프 톨스토이 그리고 고르끼 같은 당대 거장들이 한 번쯤 다녀갔던 곳이기도 하다. 그 유명세 덕분에 시골 여인숙 같아 보이는 이 호텔은 결코 싸지 않은 방값을 현금으로 지불해야 숙박이 가능하다. 담장으로 넓게 에워싸고 있는 예술인촌에 숲이 우거진 여름이든 아니면 하얀 눈으로 무릎까지 덮여있는 한겨울쯤 연젠가는 꼭 오리라 자신에게 약속한다. 담장 입구 앞에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목재로 길게 울타리를 두른 가옥이 있다. 틈새로 사과나무와 또 다른 과일나무 그리고 꽃으로 분장한 텃밭과 함께 2층으로 지어진 목재가옥이 보인다. 바로 파스테르나크 박물관이다. 우리에게도 너무 잘 알려진 7~8십 년대에 무수히 방영되곤 했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저자, 파스테르나크가 8년 동안 이곳에서 집필했고 노벨문학상 당선작 발표 후 2년 만에 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그 유명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이 작고 구석진 외진 곳이고, 심지어 러시아 토착인들 마저 모를 정도로 마치 숨겨둔 곳 같은 은둔의 장소 같다. 실제로 찾아가면서 동네 주민에게 세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그중에 한 분만이 위치를 정확히 알려줄 정도였다.

박물관 내부는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그지없이 초라해 보였다. 작가니까 으레 있는 다양한 책들로써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고, 그리고 생활 도구에서 침실까지 여느 작가들의 가정집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뜻밖에 인상적인 것들로 흥미를 끌고 있는 몇 가지가 있었다. 또 다른 방에 놓여있는 피아노며 50호 크기의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가의 초상화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학가의 방 한 칸에 놓여있는 피아노와 음악가의 거대한 초상화의 그림, 아마도 이런 초상화를 완성한 화가는 일리아레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곳에서 전공은 제각각 다르지만 많은 예술가가 함께 모여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면서 당시 어려운 생활을 서로 위로하면서 그들만의 예술을 지탱해온 힘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하고 느꼈다. 그러면서 그것들로부터 나름대로 위로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을 떠나오면서 그의 침실에 있는 침대, 그리고 이 침대에서 임종을 맞이했고, 이제 주인은 떠나고 홀로 남은 그의 침대 모습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맴돌았다. 앞마당에서 그가 틈틈이 일구던 텃밭과 함께 어느 웅장하고 금빛 화려했던 박물관이나 미술관보다도 더 진한 여운을 남겼다. 작가는 꼬박 8년 동안 대작을 쓰면서 이곳에서 은둔 아닌 은둔 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그의 여비서 겸 원고를 써준 애인과 함께 죽기 전까지 이곳에서 10년을 채웠다.

 

나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다. 러시아 제자와 찾아간 첫 방문 때는 박물관 마감 시간을 놓쳐서 되돌아왔다. 눈이 제법 쌓여있는 추운 겨울이었고 마감 시간도 겨울이라 낯이 짧아 평소보다도 일찍 문을 닫은 것 같았다. 두 번째 방문 때는 문을 닫는 휴일이라 또 한 번 허탕을 쳤다. 이때는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박물관 입구만이라도 보고 되돌아온 내게 주는 감흥은 무척이나 크면서도, 또 한편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가슴에 남아있었다. 왜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노벨문학상 지명이 공산주의 문학가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남겼을까. 노벨문학상 지명자란 이유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으로부터 추방을 명받았고 그 후 여러 번의 탄원 끝에 추방을 면제받게 된다. 그러나 2년간의 병마와 싸우다가 결국 그는 이곳 구석진 자신의 한 평 남짓 크기의 침대 위에서 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 톨스토이 무덤 앞에서-전상규 원장

 

[4] “수즈달(Суздаль)에서는 넘쳐도 해가 되지 않는다.”

 

 

수즈달Suzdal, Суздаль

러시아 서부 블라디미르 주 북부의 도시. 인구 12000. 러시아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임. 고대 러시아 건축물이 있음.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좋은 문학이나 예술 작품을 대하는 것은

보드카 한 잔을 마시는 일과 같다

 

러시아 유명 작가 안톤 체호프가 자신의 글에서 남긴 이야기다.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시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이다. 그는 러시아인들이 과거 역사에서 존경하는 인물 중에 피터대제와 레닌 다음으로 세 번째를 차지할 만큼 사랑받는 인물이지만, 38세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시인이기도 하다. 어처구니없게도 푸쉬킨의 애인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두고 벌어진 프랑스 장교와의 결투에서 총에 맞아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의 신혼생활을 접고 상트페테스부르크로 이사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참극이었다. 미모가 얼마나 걸출하기에 당시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는 궁정 무도회에서 그녀를 자주 보기 위한 속내로 푸쉬킨을 명목상 황실의 침소부시종장이란 직책으로 임명할 정도였고 푸쉬킨의 집은 당시 황제의 궁정 가까이에 있기도 했다. 애인의 뛰어난 미모가 오히려 푸쉬킨에게는 독이 된 듯하다.

세상사 돌고 도는 얘기에 차고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하지 않았던가!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2시간을 가면 블라디미르란 도시가 나온다. 모스크바 황금 고리의 하나였던 고대도시였지만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쟁 군수물자를 공급해주던 전초 기지로서 더 잘 알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다시 버스나 택시로 30km만 더 가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작은 마을이 나온다.

말굽 모양으로 펼쳐진 작은 마을은 작은 개울이 말굽 모양을 따라서 흐르고 안쪽으로는 성곽과 함께 성당들이 자리 잡고 있고 외곽으로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다. 10세기에 출현해서 러시아 정교와 문화적 전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있는 농촌 마을이다. 3층 이상 주택건설이 금지되어 있어서 호텔과 식당들은 단층이나 2층으로 깔끔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으니 관광객들에게 신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넓은 들판 위에 곳곳에 펼쳐진 러시아 정교 건물들과 기다란 높은 성곽 그리고 마을 초입에 흐르는 개울과 목조로 만들어진 다리 등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평화와 여유가 찾아오고, 입에서 나도 모르게 노랫말이 절로 나올 만큼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더러 비가 오는 여름날에 삼삼오오 동네 아이들이 모여 개울에서 물장난을 치기도 하고 투박한 장대로 만든 낚싯대를 개울에 담그고 고기를 잡는 모습은 시골스러운 운치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개울을 지나는 목조로 된 다리 위로 노인이 소달구지에 볏단을 가득 싣고 지나가고 송아지는 어미 뒤를 따라 재롱을 부리면서 마치 주변 들판을 자기 놀이터마냥 뛰어다닌다. 개울을 지나면 꾸불꾸불한 논두렁 위를 우산이나 비닐을 뒤집어쓴 이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짝을 지어 기우뚱기우뚱 넘어질 뜻 조심스레 지나가는 모습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정겹게 보인다.

여름도 좋지만, 가을이면 가을대로 들판이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 하며 과일나무들이 가지가 찢어질 만큼 주렁주렁 열려있어서 지나가는 이방인들에게 두서너 개씩 따가도록 만큼 인심도 후한 마을이다. 하늘에는 온천지 얕게 내려앉은 뭉게구름으로 들판을 가득 덮고 있다. 담벼락 위에는 호박넝쿨이 길게 뻗어있고 담장 너머에는 코스모스와 장미꽃 그리고 이름 모를 각종 꽃들이 예쁘게 피어나 주인의 아름다운 심성을 헤아리기에 충분하다.

겨울이면 천지가 눈으로 소복하게 쌓여서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선사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모스크바 외곽을 에워싸고 있는 골든 링이라고 불리는 곳 중 하나인 수즈달이란 마을이다. 이곳을 방문하러 갈 때마다 예정된 시간보다 언제나 한 시간 이상이나 늦게 도착하게 된다. 가는 길에서도 볼 만한 아름다운 곳들이 너무도 많아서 매번 조금씩 짬을 내어서 중간중간 보고 가느라고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수즈달은 눈에 넘치는 특별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을 중심에는 천년이란 세월 동안 전통시장이 장을 열어 저마다 지은 농산물과 각종 지역특산물들로 자리를 깔고 저렴한 가격으로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 팔리는 인기 있는 품목은 작은 오이로 저린 식재료와 꿀인 것 같다. 옹기종기 모여 시장과 마을을 이루고 생활한 지도 벌써 천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글을 쓰는 작가와 화가들 그리고 사진작가들이 특히 이곳을 많이 찾아오는 명소이기도 하다. 내게는 몸과 마음을 힐링하기에 그지없이 좋은 명당처럼 보인다.

 

특히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 중에는 꿀을 재료로 해서 만든 메도부하란 지역특산물인 술이 있다.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된 통에 담아서 파는 13도 정도 되는 맑은술은 이 지역에서 나오는 천연꿀을 첨가해서 만든 술이라 약간의 단맛은 특히나 여성들 취향에 맞아서 인기가 많다. 게다가 술값이 저렴한 데다가 도수가 낮아서 남자들에게는 물처럼 마시게 된다. 또 여성분들에게는 혀끝에서 당기는 단맛의 유혹에 못 이겨서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마다 메도부하란 술로서 밤을 지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원래 러시아인들이 즐겨 마시는 술은 호밀이나 귀리 보리 등을 재료로 해서 찌고 발효시킨 후 알코올 함량 95%가 넘는 원액을 물로 희석하여 도수를 낮추고, 그 후에 자작나무 숯으로 반복해서 냄새와 색을 여과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무색무취의 투명한 40%의 보드카가 만들어진다. 40이란 숫자는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유명한 러시아 화학자가 쓴 논문에서 비롯되었다. 몸에 잘 흡수되고 건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최상의 술맛을 만들어 내는 알코올 도수가 40도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보드카는 40도가 정석이 되어버린 듯하다.

요즘에는 우리네 폭탄주처럼 보드카에 맥주를 4:1 비율로 섞어 마시는 요르시라는 더 독한 술도 자주 만들어서 즐긴다. 륨카라는 작은 잔에 받아서 한입에 털어서 삼키듯 마신다. 주로 안주로는 검은 빵과 캐비아 그리고 삭힌 청어 절임인 셀료트카와 함께 먹는다. 그리고 보드카는 러시아 어느 지역이나 구석진 가게에서조차도 쉽게 살 수 있는 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드카를 비롯한 이런 독주는 누구나 쉽게 마시기에는 너무 독한 술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맛보는 32도의 발잠은 두 종류의 블랙과 블루로서 한결 더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맛과 독특한 향이 있다. 아주 부드러운 입맛에 알코올 32도라는 다소 높은 도수를 잊고서 여성들이 맛을 보고 나면 좋아하는 술이기도 하다.

그런 것에 비하면 수즈달에서 마시는 13도짜리 메도부하는 특히 우리에게 술이라기보다는 음료수에 가까워서 술을 물처럼 마시는지도 모른다. 지인들에게 권해드린 술잔이 내게로 되돌아오길 수십 번 하고 나서도 가게에 술병이 동이 난 것을 보아야 끝이 난다. 매번 이런 때는 아침에 누군가가 내 신발을 내 숙소방문 앞에 가지런히 두고 간 것을 보고 나서야 하룻밤이 과했던 것을 깨닫곤 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모두가 즐겁게 하룻밤을 잘 마무리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어쩌면 그만큼 이곳 풍경에 도취되어 긴장의 끈을 놓고 마음 편히 지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이곳을 방문하더라도 분명 넘치는 잔에 기쁨을 동행한 분들과 함께 똑같이 반복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도시라고 느낄 수 있는 때가 전혀 없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곳 수즈달에서 한 달 살아 보기아니 한 주 살아 보기라도 계획을 세워서 실천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려 본다.

넘치면 해가 되는 것도 당연히 있겠지만, 넘쳐도 해가 되지 않으려면 아마 때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 같다.

 

 

▲ 상트페테르부르그의 야간주택거라

 

[5] ‘백만 송이 장미의 나라라트비아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 다시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 할 때만 피는 꽃 백 만송이 피어 보래는

진실한 사랑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 ~ ~

많은 사람으로부터 한동안 사랑을 받아온 어느 가수의 백만 송이 장미란 제목의 노랫말이다.

러시아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자동차로 장장 10시간을 달려가면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란 도시에 도착한다. 출발할 때쯤 어둠이 서서히 찾아오고 간간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발트 3국 중에서 가운데 위치한 작은 나라이다. 발트 3국 하면 위치상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가리키는 나라들로서 맨 가운데 위치한다. 에스토니아 탈린과 리투아니아 빌뉴스 그리고 라트비아 리가는 유럽문화의 수도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가는 사랑받는 도시들이다. 특히 라트비아는 심수봉 가수가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노래 작곡가의 모국이기에 우리에게는 더 친숙한 국가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합병 그리고 1991년 소련연방 붕괴 당시 독립하면서 인구 2백만이 채 안 되지만 모국어인 라트비아어와 유로 화폐를 사용한다. 북유럽에 위치하는 국가답게 양호한 경제적 성장률에 생활 수준도 낮지 않은 국가다. 소련의 지배를 받았지만 특별한 국교가 없이 러시아 정교 신자보다도 루터교와 카톨릭의 신자 수가 더 많다. 스포츠 종목 중에서 아이스하키와 봅슬레이 종목의 강대국이면서 체스게임의 세계 1등 선수 보유국이기도 하다. 특히 라트비아 수도 리가소련연방에 속해 있을 때 보드카 중에서 다소 알코올 농도가 낮은 32도짜리 맛있는 발잠이란 보드카 생산국가로서도 높은 신뢰와 명성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어느 영화감독이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기 위한 종착지로 타진하러 갔다가 코로나에 걸러서 정말 마지막 종착지가 되어버린 뉴스로 국내에 알려진 도시 이름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국도는 러시아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리가로 넘어가는 주도로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에서 가는 길은 기차와 국도로 가는 두 가지가 있지만, 더 남쪽에서 질러가게 된다. 일반적인 관광객들이라면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으로 가는 북쪽 길을 따라가서 탈린을 관광하고 난 후에 다시 3시간의 여정으로 리가로 내려오는 코스가 정상적이다. 난 한 주간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새로운 길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운전자는 오랜 친구 관계인 젊은 알료샤가 맡았고 그의 졸음운전을 막아줄 조수석에는 그의 애인 엘레나가 앉아서 10시간을 수다 떠는 역할을 맡았다. 덕분에 난 뒷좌석 상석에 앉아서 맛있는 러시아산 빨찌카 넘버7 캔 맥주를 마시면서 스쳐 지나가는 경치를 즐기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완전한 어둠이 내리고 라트비아 국경선에 다다를 즈음에 내리던 빗줄기는 이제 눈으로 바뀌어서 자동차의 속도까지 늦추게 된다. 도로 사정도 그다지 좋지가 않은데 가로등조차 없으니 자동차 등불이 비추어 주는 가시거리만이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나마 도로가 굴곡이 별로 없이 직선에 가까워 위험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도로 위에 얇게 쌓인 눈과 주변 나뭇가지에 내린 눈들이 분위기를 한층 더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다가 나타나는 사람들의 인적을 알리는 집들과 도로변 가게 그리고 어쩌다가 마주하고 지나가는 차들이 전부였다. 정말 한적한 곳이다. 아마 관광시즌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한적한 도로인 것 같다. 여름 관광시즌에는 이 도로도 관광객을 태운 자동차로 몸살을 앓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다. 도로 한가운데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크기에 초소와 도로 위에는 막대로 길 위를 차단해 둔 게 전부다. 그들은 우리들의 여권을 회수해 갔고 잠시 후에 돌아와서는 러시아 국적의 여권은 돌려주더니 내게는 근엄하게 무게를 잡더니 왜 비자가 없느냐고 따져 묻는다. 난 가볍게 웃으면서 한국인은 노비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상한 듯 내게 내리라고 한다. 중간에 엘레나가 끼어들어서 설명하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내 여권을 갖고 온갖 장비로 검색을 다 해 보더니 다시 상부에 전화를 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 언어로 한참 대화를 마친 후에 그때에서야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미안하다고 한다. 아마 한국 여권을 가지고 이곳으로 통과한 사람이 내가 처음인가 보다. 나도 그들에게 웃어 보이면서 한국 여권 소지자는 모두가 노비자로 이 나라를 방문하고 이 나라에서 대우받는 사람들이라고 꼭 기억해두라고 나도 그들에게 너스레를 떨어본다. 그러자 아까 본 근엄했던 그들의 태도는 어디에도 볼 수가 없었고 이제는 웃음으로 내게 화답한다. 즐거운 여행 하시라고~.

 

국경선을 통과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러시아에서 이웃 나라인 핀란드나 에스토니아 그리고 이곳 라트비아를 넘어갈 때는 국경담당자들 얼굴에는 언제나 불친절함과 경계의 눈초리로 여권을 검색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러시아인들의 여권검사는 비자와 함께 더 까다롭게 심사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이것도 아마 2차 대전 이후 소련연방에 편입되면서 소련연방붕괴까지 그들이 소련으로부터 오랫동안 받아온 억압에서 비롯된 감정에 표현인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발트 3국인들 그들끼리 보여주는 감정은 친절하기 끝이 없었다. 심지어 이들 3국에서 대접을 잘 받으려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도 가급적이면 자제해야 한다. 물론 그들도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사용하지만 감정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러시아서 핀란드 헬싱키로 넘어가는 기차에서의 여권검사는 아주 친절하고 간편하게 5초면 끝이 난다. 즐거운 여행 하시라는 미소 섞인 그들의 표정이 여권 검사의 전부다. 그러나 체코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여권검사는 너무 간편하다. 가다가 보면 이미 이웃 나라로 넘어온 것을 단지 알 뿐이다. 또 리가에서 비행기로 아이슬란드에 도착하면 심사 자체가 없다. 독일 뮌헨에서 체코로 입국할 때도 여권심사가 아예 없이 자유롭게 통과한다. 이는 그들끼리의 인적 물적 흐름을 원만이 하고자 체결한 솅겐조약덕분이다. 이 조약에 가입한 국가는 26개국으로 그들끼리는 여권이나 비자 없이 서로 자유롭게 왕래가 보장이 된다. 또한 핀란드 헬싱키서 크루즈를 타고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입국할 때도 아무런 검사 없이 자유롭게 입국이 가능하다. 물론 우리나라 여권으로도 세계 어느 나라든 쉽게 갈 수가 있다. 그만큼 우리도 비자 없이 통과할 수 있는 특급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지위와 거기에 상응하는 국가로서 대접받고 있다는 것을 해외에서 느끼는 순간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어느 나라를 가던 입국심사대 앞에서 줄을 서게 될 때 중국인 뒤에서 줄을 서서 입국심사를 받게 되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면 입국 때 걸리는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다. 이것도 필요한 요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 여권 소유자에게는 일일이 비자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늦은 새벽에 리가에 도착한 우리는 예약된 호텔에 도착해서 피로를 술로 풀고 자기로 의견을 모았고 이 나라에서 생산된 보드카 발잠으로 내 방에서 시작된 여흥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까지 몰랐지만, 알료샤가 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발잠 예찬가란 것도 처음 알았고 그가 즉석에서 발잠 블랙과 블루로 혼합해서 만든 폭탄주까지 받아 마시면서 보드카의 풍미를 더 만끽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리가의 첫날밤을 보냈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답게 도시는 볼거리가 많았다. 발트3국 중에서도 리가는 도시형태가 가장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구시가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습들을 헬싱키나 탈린에서는 볼 수가 없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도심 입구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을 비롯해 주변에 조성된 작은 공원과 수로에서는 도시민들이 산책하게 좋게 가꾸어져 있었고 구시가지 내 건물들은 겨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으로 겹겹이 연결되어 지어져 있었고 도로 바닥은 주먹보다 더 큰 돌로 포장이 되어 매서운 겨울을 극복하게끔 건설되어 있는 것 같았다. 구시가지 건축물들은 12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지어지기 시작한 것들로서 세인트피터교회를 비롯해서 삼형제건물 그리고 길드조합건물 일명 검은 머리 전당이라 알려진 건축물이 구시가지에서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명물들이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다니다 보면 예쁜 기념품 상점들도 볼 수가 있고, 아담한 레스토랑과 카페에 들러 음식도 맛보면서 함께 온 연인과 친구 그리고 지인들과 더없이 편하게 담소 나누면서 여행의 기쁨을 만끽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정을 돈독하게 이어나가는 분위기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나는 이곳에서 감자와 치킨으로 요리된 기막힌 음식을 맛보았다.

내가 이 도시를 다시 찾은 때는 그해 다음 겨울이었고 이때 날씨는 최저 영하 22도의 기록적인 추위를 찍은 탓에 나와 함께 온 작가분들은 3일 동안이나 외출을 못 하고 호텔 내에서만 머문 기억이 난다. 이런 한겨울의 리가 날씨도 늦은 봄이 찾아오면 갑자기 돌변하여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이하느라 구시가지는 사람들로 몸살을 겪곤 한다.

리가에 있는 대학도 헬싱키나 탈린에 있는 대학들마냥 유럽형 대학이라 캠퍼스가 없이 건물들만이 옹기종기 붙어있었고 더러는 여러 군데에 나누어 분산된 곳도 있었다.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공원 끝자락에 볼 수 있는 오페라 하우스 건물은 아름답게 지어져 리가 시민들의 예술에 대한 수준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공원을 가로질러 도심 중심부로 들어가면 거대한 쇼핑몰이 나온다. 어느 나라에 가든 마트를 들러보면 그 나라에 생활 수준과 함께 문화를 파악하기에 더 좋은 곳은 없는 듯하다. 말 그대로 없는 것 없이 모든 것들이 잘 정리되어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 나라도 치즈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서 그렇게 치즈 종류가 많은 것도 처음 접하게 된다. 유럽인들은 맥주나 보드카를 마실 때 안주로는 치즈와 절인 청어 새끼 그리고 철갑상어 알을 주로 애호한다. 그래서인지 치즈는 헬싱키에서부터 탈린을 이어 리가까지 내려오면서 마트에 들러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식품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베니스 태생인 마르코 폴로는 유럽인으로서 동방에 관해 서술한 최초 기행문을 썼다. 1200년 중반에 서구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하면서 쓴 동방견문록에서 그는 중국 원나라 방문지에서 그들이 화폐사용과 화장 문화를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폴로가 쓴 글에는 다른 문화와 관습에 대한 경멸심도 없고 서구문화에 대한 자부심이나 우월감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는 자기문화의 잣대로 다른 문화를 재보려는 태도가 아닌 새롭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더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단지 그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성장해온 기독교적 문화관점으로 인해서 종교적 기술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기술을 보게 된다. 콜럼버스 또한 그가 신대륙 발견을 위해 항해하는 내내 항상 동방견문록을 지참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많은 허구와 과장된 글들이 책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초기시대에 미지 세계를 알아가고 찾고자 할 때는 이 책 또한 분명히 가치가 있었을 것 같다.

발트3국을 여행하면서 동방견문록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내내 생각나게 한 이유는 이들 3국이 겉으로 보이는 것도 신비롭고 낯설었지만 머무는 동안 내내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여유로움과 관대함에 있었다. 내게 보여주는 그들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평등한 가치관을 갖고 우리를 대하는 그들의 눈 속에서 고귀한 가치관의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가와 탈린은 더더욱 내게 아름다운 도시로 남아있다.

 

 

러시아·유럽 문화교육원 원장 전상규

 

 

 

▲ 볼쇼이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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