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후의 욕망이 부른 초나라의 그림자
한 여인을 둘러싼 세 나라의 운명

제환공과 관중이 천하 경영의 힘을 다지고 있을 무렵, 대륙의 서남방 한동(漢東) 땅에서는 또 하나 중원 제패를 도모하는 세력이 싹트고 있었다. 바야흐로 남방의 맹주 초나라의 태동기였다.
초는 자생적 부족 국가로서 원래 묘족(苗族)에 속한다. 이 시절 그들은 한수와 장강의 중류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지금이야 인공 댐들이 들어서서 속도가 느리지만 원래 빠르고 힘차게 흐르는 물길이었다. 그래선지 초의 조상들도 빠른 물살처럼 거칠고 성격이 강한 부족으로 노래와 춤과 놀이와 싸움을 좋아했다.
초무왕 시절 한수 일대를 정벌하고 맹주가 된 후에, 왕실에 작위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왕실로서는 벼슬 값을 튕기는 과정이라, 한두 차례 고개를 숙였으면 당연히 내려줄 작위였지만 무왕은 화가 났다. 실력도 없이 허세만 부리는 왕실이 가소로웠던 것이다.
“좋다! 그까짓 작위, 안 준다면 내가 스스로 올리겠다.”
초(楚)는 이후 독자 노선을 택하여 아예 스스로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왕실의 체면치레 위선과 신흥국가의 분노가 부딪힌 결과로서, 이제 주 왕실의 임금도 왕이고 초나라 임금도 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왕실은 부랴부랴 자작의 작위를 제수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번 내걸린 왕호는 계속 이어졌다. 더하여 주변에 있던 소국들을 차례로 정벌하면서 대륙의 남방을 호령하는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다음 대 초문왕에 이르러, 주변의 나라들은 하나같이 조공을 올리고 눈치를 살폈으나 오직 채(蔡)나라만이 굴복하지 않았다. 채도 한때는 중원의 강자였던 데다, 왕실의 부마국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채나라가 부마국이던 시절은 전대의 일이지만 허울뿐인 자존심은 남았다. 그 자존심으로 중원의 열국과 우호를 맺어가면서 오랑캐에 맞서고 있었다.
이때 채나라 임금 채후는 이웃하는 식(息)나라 임금과 동서 사이로 둘 다 진(陳)나라 진후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있었다. 진후의 딸들이 모두 아름다웠으나 특히 식나라 부인이 된 규희(嬀姬)는 천하절색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은근히 식나라를 만만하게 여기던 채후는 처제를 꼭 한_번 만나보았으면 했다.
한번은 규희가 친정에 다녀가느라고 채나라를 경유하게 되었는데, 소식을 듣고 채후가 그녀를 궁중으로 불렀다. 직접 마주 대하고 보니 과연 규희는 천하절색에다 여리여리한 몸매에 허리는 잘록한데, 앞 가슴께 옷 위로 가슴 굴곡이 불쑥 드러나 보였다. 왕은 잠시 숨이라도 멈춘 듯한 충격 속에서 차츰 깨어나 여인의 자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언니 채 부인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전혀 다른 느낌이다. 남자는 그 둘을 자신의 양옆에 함께 눕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기어코 어느 순간 다짜고짜 여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규희가 기겁하고 일어서려는데 어느새 두툼한 손이 궁금하던 젖가슴부터 움켜쥐고 있었다. 이런 막무가내는 그가 군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절대_군주는 장소나 상대를 가릴 필요 없이 아무 때고 내키는 대로 색정을 분출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때 마침 규희의 언니 채 부인이 나타났다. 부인은 동생이 궁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 찾아 나섰다. 남편이 평소에도 인물이 반반한 여자를 보기만 하면 덥쳐버리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은연중에 남편을 숫염소라고 불렀다. 말이나 소는 새끼를 낳을 시기를 살펴서 교미하는데, 양과 염소는 계절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아무 때나 암컷을 보면 우선 올라타고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채 부인 덕에 이날의 일은 더 진척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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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본국으로 돌아오자 규희는 남편 식후(息侯)에게 형부의 짓거리를 일러바쳤다. 자존심이 상한 식후가 대부 굴종과 의논한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자가 있는가? 나는 이대로 참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이자를 응징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라 했습니다. 초나라가 우리를 어쩌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채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채후와 척지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이롭지 못합니다. 다행히 부인께서 별 탈 없이 돌아오셨으니 오히려 예쁜 처자 몇을 보내시면 채후가 스스로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식후도 그만한 이치를 모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처받은 젊은 사내의 자존심이 이를 그냥 묻어둘 수가 없었다. 초문왕에게 비밀 서신을 보냈다.
“채후가 오만하고 기고만장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오죽하면 지엄하신 대왕의 위엄에 맞서겠습니까? 이를 어찌 그냥 두고 보십니까? 내달 보름에 그를 송림 땅으로 불러낼 테니 군사를 매복했다가 잡아들이십시오. 우리 식나라는 더욱 충심으로 대왕을 받들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제의에 초문왕은 즉시 양국 간 상호불가침의 협약서로서 화답하였다.
“…이날로부터 초(楚)는 식(息)과 영구적인 동맹을 맺을 것이다. 우리 양국은 자자손손 함께하리라….”
때는 9월이었는데도, 마침 그해가 윤년이라 6월이 두 번 있었던 탓에 가을이 제법 깊어 있었다.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 사냥이 적기였다. 식후가 채후에게 함께 곰 사냥을 하자는 초청장을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처제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채후는 얼씨구나! 하고 대뜸 송림 땅으로 나왔다. ‘사냥이 끝나고 술자리에서 처제를 한 번 더 보려나?’
웬걸, 그날 밤에 채나라 군사는 매복하고 있던 초군에게 습격을 당하여 부랴부랴 식나라 도성으로 쫓겨 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식나라 임금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동서를 성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등 뒤에서는 초나라 군사가 사정없이 두들겨대니 허둥지둥헤매다가 군주마저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식나라는 술과 고기로 초군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제야 채후는 속임수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잡혀가는 함거 속에서 깊이 원한을 새겼다.
“내가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만 해봐라. 그날로 이 인간을 손을 보고야 말리라!”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초문왕은 채후를 대전 뜰로 끌고 오게 하였다. 넓은 뜰에는 가마솥이 걸려 있었고 새벽부터 장작불을 피워댔는지 물은 이미 펄펄 끓고 있었다. 왕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저 발칙한 놈을 가마솥에 넣고 삶아라. 오늘 과인이 우리 초에 맞서는 자의 최후가 어떤지 본보기로 삼아야겠다!”
채후가 정신이 아득하여 다리가 풀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대부 육권이 나섰다.
“채후를 삶아 죽이면 채나라는 누군가를 군주로 세워 우리와 대적할 것이고, 열국의 제후들이 대왕을 경원시하게 됩니다. 그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항복의 서약을 받고 그를 살려 보내심만 못합니다.”
왕도 그만한 짐작이 있는 인물이라, 이쯤 겁을 주는 걸로 채후를 용서하기로 하였다. 기왕지사 일이 좋게 마무리된 마당에 위로하는 뜻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부랴부랴 가마솥이 치워지고 그 자리에 연회용 병풍이 쳐졌다.
잠시 후 종소리를 신호로 병풍 뒤에서 미녀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 무희들은 특별한 치장을 하였다. 짧은 상의 아래에 진주로 만든 장식 끈을 걸치고, 꽁지를 세 가닥으로 땋은 가발을 쓰고 있었다. 중원의 여인처럼 검고 윤기 흐르는 가발이다. (1972년 초나라 땅이었던 장사시 마왕퇴의 한묘에서 발굴된 여인의 미라도 가발을 쓰고 있었다. BC 300년경)
남방의 예술은 충동적이다. 무희들의 노출도 심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긴 옷과 붉은 허리띠, 넓은 목걸이와 옥팔찌로 치장한 여자들이 낭창낭창한 몸매를 간드러지게 흐느적대며 허리를 배배 꼬며 돌린다. 어느결에 육권이 다가오더니 채후에게 술을 권했다. 어쨌거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엉겁결에 벌떡 일어나 술을 받았다. 뒤이어 다른 신하들도 다투어 술을 권했다.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자 채후도 긴장을 풀고 여자들에게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무희가 있었다. 시원스럽게 솟은 콧대와 깊숙한 눈, 그녀의 얼굴은 매우 섬세하면서 고귀한 느낌을 주었다.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만난 익숙한 느낌이었다. 박자를 세듯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연신 생글생글 웃음을 짓는 양이 자기에게 붙잡혀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채후도 이 순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색다른 계집인걸. 나이도 어린데, 남방 것들은 모두 이런가?’
이를 지켜보던 초문왕도 나름대로 짐작한다. ‘이 자가 여자를 밝힌다더니 과연 그런가 보구나. 목숨을 붙여놨더니 이제 계집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하기는 사내라면 암말처럼 예쁜 계집을 마다할 수 없겠지. 어디 저 무희를 줘서 마음을 좀 달래야겠구나.’
이 시절의 무희는 노리개로서 대개 ‘선물용’으로 쓰인다. 초문왕은 흑단 미녀를 불러 채후의 술 시중을 들라 일렀다. 그러고 지나는 길에 물었다.
“채나라 군주는 평생에 절세미인을 본 적이 있으신가…?”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자 채후는 불현듯 처제인 규 씨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흑단 미녀의 분위기가 규 씨를 닮아 있었다. 동시에 그녀 때문에 온갖 수모를 당한 분함이 사무쳤다.
“아마도 세상 여자 중에서 식 부인 규 씨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없을 것입니다. 천하절색인 얼굴에다, 동작 하나하나가 은어처럼 팔딱거립니다. 신이 많은 여인을 접하여 보았사온데, 보자마자 여인의 진가를 알아챘습니다. 사실은 신과 식후의 사이가 틀어진 것도 다 그 여인 때문입니다.”
왕은 채후의 말에 부쩍 호기심이 생겼다.
“여인의 진가라? 팔딱거린다…? 허허, 과인이 그 여인을 한번 보고 싶구나…!”
“대왕의 위엄으로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식나라를 한 차례 순시하시어 천하절색을 만나보시지요.”
“그런가? 흐흐흐….”
그 후 채후는 호랑이 굴을 벗어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식나라 규 씨의 문제는 대충 넘길 문제가 아닌 게 돼 버렸다. 이날 이후로 왕은 규 씨에 대한 궁금증으로 어딘지 모르게 답답해서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보지 않고도 욕망은 커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한 달을 못 채우고 식나라 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날 해 질 녘이 되자 왕은 본심을 드러냈다.
“예까지 온 김에 내일은 식나라 도성에 가봐야겠다.”
전례 없던 행차라 식나라 조야가 함께 놀랐다. 부랴부랴 연회를 베풀어 초문왕을 대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왕의 관심은 처음부터 다른 데 있었다.
“지난날 과인이 군후의 부인을 위하여 작은 수고를 한 적이 있다. 오늘 부인의 손으로 술 한잔을 받고 싶구나….”
규 씨가 예절에 맞게 성장하고 들어와 대전 바닥에 넓게 치마를 펼치고 앉았다. 화려한 치장을 피했으나 타고난 아름다움과 조여 맨 가슴의 굴곡을 감출 수는 없었다. 볼수록 빼어난 몸매와 자색이었다. ‘과연, 과연, 어찌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을까!’
왕이 깊이 한숨을 내쉬며 여인을 바라본다. 여자가 헌수의 술을 올리고 살며시 고개를 드는데 서로의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왕의 눈에 무언가 맑은 빛 한 줄기가 번쩍하고 찔러왔다. 전율을 느끼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규 씨의 눈 속에 영롱한 광채가 숨어 있었다. 왕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덥석 백옥같이 하얀 섬섬옥수 손목을 잡으려는데, 여자는 술잔을 궁인에게 건네주고 이미 손을 거둔 뒤였다. 규 씨가 두 손을 모아 풍성한 가슴을 안듯이 물러나는데, 왕의 눈길은 손이 닿을 수 없는 여인의 뒤태를 안타깝게 쫓고 있었다. 그녀의 출현은 기적의 순간처럼 가슴속에 각인되어, 이제는 규 씨 말고는 세상 누구도 그 불길을 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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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완 (韓 莞) 작가 |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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