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연민, 자비의 문제를 서양 철학으로 접근해 본다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4-09-18 1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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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환대(hospitality)는 공감을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긍휼(compassion)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이다
-상대와 자신의 아픔을 긍휼로 환대해가며 치유해 궁극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정신이다. 나는 예수에게서 그 환대를 보았다.
-자아실현이 안 된 사람이 '타아'실현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구이다.
-소통을 잘 하려면, 권력보다 권위가 중요한

 

   

어제 사유했던 연민, 자비의 문제를 서양 철학으로 접근해 본다. "고통을 느낀다면 살아 있다는 뜻이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면 사람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가 한 이 말이 오늘의 화두이다. 영어로 컴페션(compassiom)이라는 연민(憐憫) 또는 긍휼(矜恤)empathy라는 공감(共感) 또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는 말의 차이를 우선 알아본다.

 

연민 또는 긍휼(compassion)compassion이 합쳐진 단어다. 여기서 'com'이란 '같이 혹은 함께 한다'는 뜻이고, 'passion''고통'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하면, 'compassion'이란 '고통을 함께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연민과 긍휼은 뉘앙스가 있다. 여기서 긍휼의 학문적 정의에서는 행동 측면이 부각된다.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수준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혁신적이고 창의적 행동이 일으켜질 때 긍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감정이입은 말 그대로 하면 자신의 감정을 대상으로 이입시키거나 대상의 감정을 자신에게 이입시켜서 서로 공감하는 것이다. Empathy는 대상을 이해하는 것에서 나아가 감정이 이입되어 깊은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는 깊은 단계의 '공감'을 나타내며, sympathy는 대상을 이해하고 동감하나 그 대상이 된 것 같은 깊은 단계는 아닌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공감을 대신하는 개념으로 환대(hospitality)가 절실하다. 여기서 말하는 환대는 공감을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긍휼(compassion)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을 의미한다. 긍휼이란 단어를 나의 앱 <모든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간단한 단어가 아니었다.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돕는 것'이다. 나는 방점을 '돕는 것'에 찍고, 나의 '긍휼 정신'을 반성해 보았다. 불쌍히만 여기고, 돕기를 하지 않은 마음이 찬바람처럼 불어왔다. 긍휼을 한문으로 써보아도, 언뜻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긍휼의 영어 표현이 compassionmercy 두 개였다. Compassion을 우리는 '연민'이라 하고, mercy'자비'라 한다. mercy의 동의어가 humanity(인간성, 인성)이다. 그러니까 긍휼은 인성이다. 인성을 키우려면 긍휼하는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이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mercy이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인(), 어진 마음이다.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고, 철학에서는 에로스라 한다. 나는 이 에로스를 '생명력'으로 풀이한다. 공감과 달리 상처와 고통에 대한 근원적 치유 행동이 전제되지 못하면 긍휼은 아니다.

 

공감이 단순히 의사소통을 증진시키는 데는 도움을 주고, 상대의 아픔에 반창고를 붙여 주거나 진통제를 처방해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 모르나 상대방을 주인으로 온전하게 세움을 위한 치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자신의 아픔을 긍휼로 환대해가며 치유해 궁극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정신이다. 나는 예수에게서 그 환대를 보았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 윤리의식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도덕적 압력'이다. 이 윤리의식이 우리를 '선하게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아침이다. 이 말은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윤리적 주체"가 되라는 말과 같이 사용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이런 문제에 대한 사유를, 나는 언젠가 윤정구 교수의 페북을 읽고 정리해 준 적이 있다. 그리고 충북대 김연숙 교수와 10년 동안 레비나스의 책을 번역하였다.

 

윤정구 교수는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을 쉽게 설명하였다. 그걸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주체"란 타자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타자 중심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어쨌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덕목은 '()'이다. ''이란 '나쁜 짓 하지 말고 살아라'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만 생각하고, 나의 욕심에 따라 나 밖의 것을 내 것으로 자기화하지 말고, 타자에로의 초월로 타자가 보내는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 ''이다. 나쁜 사람은 '나뿐만'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사적인 욕망보다 이를 위해 도덕적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양심의 압력을 키워야 한다. 윤정구 교수는 레비나스의 철학, '타자 윤리학'을 다음과 같이 5단계로 잘 요약했다. 이는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기의 5단계로 정리가 된다.

 

1. 'Il y a(일리야)"라는 존재의 심연(웅성거림만 존재하는 '거기 있음'의 세계)

2. 향유를 통한 이기적이고 주체적 자아 (주체적인 동일성 세상에서의 향유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초월)

3. 타자에 대한 환대와 타자의 얼굴을 통한 관계적 만남-나는 이를 '접속'으로 이해한다.

4. 타자 학습을 통한 타자 되기(이를 통해 타자의 세상이 드러남)

5. 많은 타자를 통한 무한의 경험 (무한의 세상을 목격)을 통한 "윤리적 주체"로 거듭남.

 

정리하면, Il y a(일리야, '거기 있음') 향유 환대, 얼굴 타자 되기 무한 경험을 통한 윤리적 주체가 된다.


1에서 2로 초월: '그저 있음(Il y a)'의 세상에서 초월해서 사랑도 해가며 삶을 향유도 해가며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도 해가며 미래를 대비해가며 집에 소유도 축적해가며 사는 삶으로부터 초월하여 자신의 주체적 자아를 찾는 일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박노해 시인의 시, 첫 연의 마지막 질문, "내 영혼이 부르는 길을 따라갈 수 있는가"'아니오'라고 답한다. 향유를 통한 주체성과 동일성으로 쌓인 재현의 세상을 통해 내 영혼이 부르는 길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는 거다.

 

3에서 4로 무한의 세계로 확장: 자아실현을 넘어선 타자 되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타자의 얼굴에 대한 환대가 제대로 자신의 주체성을 초월하여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타자의 세상은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고, 부모를 잘 만나 세상의 행운을 다 향유해 온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낮춰 타자를 환대할 때 스스로 드러나는 세상이다.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현현(ephiphanie)된다. 타자의 세상이 그냥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때, 잘난 사람들이 자신을 낮출 때 타자는 그 잘난 이들에게 스승이 된다. 행운을 만끽해온 장본인인 나는, 타자를 환대해가며 '타자 되기'를 공부하기 시작할 때, 재현에 의해 구성되었던 우주에 균열이 생기고 이 균열을 빠져나가, 무한의 세상을 목격하게 된다.

 

4에서 5"윤리적 주체"로 거듭남: 환대를 통한 무한의 세계를 경험하면, "윤리적 주체"로 거듭난다. 다시 말하면, 환대를 통해 향유하는 주체가 초월 되어 "윤리적 주체"가 될 때 자아실현을 넘어서는 "타아(他我, 윤리적 주체)" 실현의 강한 무한 세계가 펼쳐진다는 이야기이다. 가족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윤리적 주체" 이전에, 이번 추석 기간에는 '타자 되기'를 실천해 보길 권한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전제가 있다는 거다. 몇 차례의 초월을 통해서 "타아(윤리적 주체)" 실현의 세상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일리야"의 세상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현존재가 그냥 "타아" 실현할 수 있는 도약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레비나스는 '공공(公共)의 철학'이다. 자아실현이라는 <정신모형 1>의 세상을 넘어서 "타아" 실현이라는 <정신모형 2>의 세상을 플랫폼으로 구축하여 더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곳에서 더 고르게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어 변화를 실현시키려는 철학이다. 물론 자아실현이 안 된 사람이 '타아'실현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구이다. 자신의 주체적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후 타자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자가, 내 방식대로 말하면, '위대한 개인'이다.

 

레비나스 철학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해 이를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긍휼(矜恤.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과 환대(歡待,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의 기반이라 보기 때문이다. 긍휼감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넘어져 피 흘리고 있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다. 그리고 그 질문에 응답해 자신의 주체성, 동일성, 전체성의 가면을 벗고, 타자의 고통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이런 '타자 되기'를 실현하는 세상은 결핍의 해결을 추구하는 자아실현을 향한 욕구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다. 레비나스는 이 '타자 되기'를 실현하는 세상을 여성성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환대를 제대로 해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의 얼굴에 대한 환대로 이어간다. 그게 여성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성장의 고통을 앓는다. 자신도 성장의 고통을 가지고 있고, 이런 자신의 성장의 고통에 대한 직면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여성성이다. 이 여성성은 내가 동일성의 집에 거주하고 있어도 나에 대한 환대를 느끼는 나의 얼굴이다.

 

멀리 나아갔다가, 어제 오늘의 화두로 되돌아 온다. 김창옥의 주장은 실제 일상에 더 현실적이다. 그가 최근 펴낸 책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세요>>’에서는 차라리 사랑하지 마세요. 조금 더 존중하고, 조금 더 친절하고 예의를 갖추라고 주문하는 구절이 나온다. 차라리 사랑하지 말라니 무슨 말일까. “가족이랑 친인척 사이에 너무 사랑하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사랑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첫 관문은 예의라는 것이죠. 예의 없는 사랑이 가장 폭력적인 것 같아요. 모든 부모는 그렇게 말하잖아요. ‘내가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 선배도 후배한테 내가 너한테 애정 없으면 이 말 안 했어라고 말하죠. 그러면서 예의를 안 지켜요. 예의를 안 지키면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결핍이나 얼크러진 욕망을 사랑이라고 잘못 말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거처럼, 사랑이란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이 좋은 관계의 필요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김창옥은 다른 사람과 관계가 좋고 소통을 잘하려면, 내가 나와 맺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와 사이가 좋고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이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에게 친절도 베풀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하면서 집에 오면 피곤하다고 하고 가족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그런 분들이 있어요. ‘도대체 당신은 왜 그래라고 하면 그분들은 또 이렇게 얘기하죠. ‘내가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이러냐. 우리 가족 잘되려고 그러지라고 말하며 화를 내요. 뇌공학자 선생님들이 얘기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는 부분이 있고, 외부를 인식하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배우자를 인식할 때는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는 부분으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배우자를 자기와 상당히 동일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부부 사이가 좋으면 저 사람이 여자를 너무 사랑하네’ ‘남자를 사랑하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은 자기 사랑이 좋은 사람이에요.”

 

김창옥에게 '자기 사랑'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목마를 때 우리는 물을 마시잖아요? 그런데 전문가들은 시간을 정해 물을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합니다.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통도 고통을 느낄 때 관심을 가지면 그땐 좀 늦었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정기적으로 관심을 가져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나와의 소통을 위해 관심 가는 책도 사고요. 미술관에 가도 좋아요. 유튜브를 봐도 좋고, 여행을 가도 좋아요. 정말 좋은 풍요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목마르지 않아도 별일 없어도 그런 걸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이 자기 사랑으로 이어지죠.” 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마시는 것처럼, 평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그가 좋아하는 일을 자주 한다.

 

끝으로 소통을 잘 하려면, 권력보다 권위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권위를 지니려면, 실력을 갖추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돼야 한다. 보통 실력은 있는데 낮은 자세로 상대방을 대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너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네, 나이가 많아, 사회 경험이 많아, 노하우가 많아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권력이 있고 권위가 있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다를까요? 권위가 있는 사람은 권면과 위로가 통하는 사람을 말해요. 이렇게 해보시면 어때요?’라고 누군가가 말했어요. ‘다른 사람이 말하면 안 듣는데, 당신이 얘기하니까 한번 들어보겠어.’ 하는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위로가 있어요. ‘나 힘들어~’ 하고 말했는데 아휴~ 얼마나 힘들어~’라고 그 사람이 말하면 위로가 되고 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 해야 권위 있는 사람이 되는가 봤더니, 보통 실력은 있는데 낮은 자세로 상대방을 대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내가 너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네, 나이가 많아, 사회 경험이 많아, 노하우가 많아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닌 거죠.”

 

 

관계/이우림

 

 

욕실에 내던져진 운동화 세 켤레

말똥말똥 눈을 뜨고

서로 바라본다

 

비누 풀어 거친 솔로

빡빡 씻어보지만

좀처럼 속을 허락하지 않는

운동화와 나의 관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어

세탁기 속에 처박아 넣고

버튼을 누른다

 

우당탕탕

또다시 우당탕탕

 

속을 허락하기 전까지 모든 관계는

그렇게 시끄러운 것

 

 

이 시는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운동화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함부로 욕실에 내던져진 세 켤레의 운동화는 불화를, 더러운 운동화는 갈등이 상당히 지속됐음을 뜻한다. 도무지 속을 드러내지 않으니, 더 답답하다. 좋게 말로 해서 그런지 말똥말똥 바라보기만 한다. 속을 끓이던 시인은 운동화를 빨며 감정을 추스른다. 예전 시집살이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겹친다. “거친 솔로/ 빡빡 씻는 장면은 빨랫방망이로 이불 빨래를 퍽퍽 두드리던 것과 비슷하다.

 

운동화와 나의 관계라 했지만, 실제로는 나와 운동화 주인들과의 갈등이다. 갈등보다는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아 생긴 불만이다. 운동화를 빨 때는 세제를 넣은 미지근한 물에 불려야 찌든 때가 잘 빠진다. 성급하게 화해를 시도하면 더 틀어질 수도 있다. 한데 시인은 참기보다 우당탕탕/ 또다시 우당탕탕직접 부딪치는 방법을 택한다. 다행히 통한다. 가족뿐 아니라 모든 관계는 한바탕 시끄러워야 속까지 허락한다. 한번 속을 허락한 관계는 오래간다. 오늘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의 덧붙임이 좋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 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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