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태도(attitude)의 문제이다.
-젠틀맨은, 상대가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을 말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뒤처진 사람의 심정을 아는 사람, 뒤처진 새들에게 박수를 보낼 줄 아는 사람이 젠틀맨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의 사유 주제는 '기분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한 것이,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라는 책 표지의 문장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경의 신약성서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는데, 그 것은 '주님의 기도(주 기도문)'와 '산상수훈의 팔 복'이다. 이 '팔 복'은 우리 현대인들이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한 답을 던지신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을 위한 8가지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 여덟 가지는 관념적이거나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구체적인 강령(綱領)이다. '팔 복'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팔 복의 증표'로 살고 싶다. '팔 복'을 영어 'Beatitude'라 한다. 이걸 풀면, "Be(존재)+Attitude(태도)"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그것을 마주한 인간의 역량을 측정하는 시험(試驗)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중립적이다. 그것들은 행운이고 동시에 불행이다. 그것들은 희망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건-사고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것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태도(態度)는 곰(熊)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행복의 토대를 만들려면, 우리는 우선 여러 가지 인생의 사건 앞에서 자유롭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의 고통 속에서 살아남아 이런 말을 했다.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지만 단 한 가지는 빼앗아 갈 수 없다. 인간의 마지막 자유,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할 자유이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내의 유일한 쾌락의 원천, 즉 매일 배급되는 빵 한 조각에 죄수들이 보인 태도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 빵 한 조각을 한 번에 다 먹고 큰 만족을 추구했다.
▪ 빵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하루에 여러 번 조금씩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 빵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먹고 마지막 한 조각은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간직해 뒀다.
프랭클은 마지막 태도를 취한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가장 평온했으며 가장 덜 불안해했다고 기록한다. 세계 최고령 피아니스트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111세의 알리스 헤르츠-좀머(Alice Ferz-sommer)가 들려주는 인생의 지혜는 현재에서 최선의 것을 구하고 감사하라는 것이었다. (헤럴드 경제, 2103. 2. 22) "나는 여전히 인생이 고마워요." "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처지가 나빠도 우리에겐 삶에 대한 태도를, 심지어 기쁨을 발견하고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존재가 처한 상황 속에서 태도를 결정할 자유,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인문 운동가의 태도는 글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혼자 듣고 흘려 버리긴 아까운 말들을 만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적어야 한다. 엄지혜는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다가, "중요한 것은 진심보다 태도"라는 문장을 만났다고 한다. 이 문장이 빨리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일상의 감각이 합해져 한 사람의 태도를 만"들기 때문에, "언제나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글을 읽자 "진심보다 태도" 더 중요하다는 말이 이해됐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태도(attitude)의 문제이다. 사람은 태도이다.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느냐, 죽음으로 밀려가느냐는 건 태도의 문제이다.
여기까지가 평소에 태도에 대해 내가 갖고 있었던 생각이다.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의 저자 마티아스 뇔케는 기분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에 의하면, 어제 우리가 살펴본, 젠틀맨들은 자신의 감정이 제멋대로 표출되도록 하지 않는다는 거다. 자신의 감정을 타인이 지배하도록 두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다. 쉽게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버티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젠틀맨의 태도는 항상 세련되게 거리를 둔다. 물론 친절하지만, 적당하게 다정하고 적절한 친절을 베푼다. 그리고 자신의 사적인 감정으로 상대방을 괴롭히지 않는다. 상대를 배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랑하고 싶은 감정을 절제한다. 그것이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으며, 균형을 잃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젠틀맨은 신뢰를 얻고 존경을 받는다.
젠틀맨은, 상대가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그런 상황에서도, 상대를 비웃거나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모르는 척 넘어가거나 상대가 그 당혹스러우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상대의 실수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지 않는다. 누군가를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약점을 들추어 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젠틀맨은, 상대가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을 말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품위를 인정해 줌으로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젠틀맨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특권을 요구하지 않으며 늘 아랫사람들을 존중한다. 마찬가지로,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내일로 넘긴다.
이런 태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라이너 쿤체의 시가 기억났다. 노인이나 장애인, 동물을 대하는 걸 보면 그 나라가 선진국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기보다 약한 대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독일 시인 쿤체는 뒤처진 철새를 응원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고. 남들과 발을 맞출 수 없는 사람의 심정이 어떤 건지 안다고 말하는 쿤체는 따뜻한 사람이다. 뒤처진 사람의 심정을 아는 사람, 뒤처진 새들에게 박수를 보낼 줄 아는 사람이 젠틀맨이다.
뒤처진 새/라이너 쿤체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무량심(捨無量心)이 소환된다. 붓다는 인간 마음의 가장 숭고한 상태를 산스크리트어로 "브라흐마비하라"라 했다. 숭고함이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다. 숭고함의 의미는 '셀 수 없는/경계가 없는'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셀 수 없는 마음'이 된다. 나는 이것을 '사랑의 4단계 태도: 자비희사'라고 한다. 계단을 오를수록 더 어렵다.
(1) 자(慈)=마이트리(maitri, 산스크리트어)=헤세드(hesed, 히브리어)=아가페(agape)=참된 사랑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사랑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 사랑의 초점은 상대방에게 있다. 만일 그 초점이 자신에게 있고 상대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자'는 상대방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살펴야 상대방에게 행복을 주려는 마음이다. 한자 '자(慈)'를 해석하면,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가물가물(玄)해져, 하나가 된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이트리, ‘자’는 소극적으로 내가 타인을 내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조성하는 작업까지 포함하는 큰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기꺼이 주는 마음이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숨은 노력이자 배려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향한 마음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한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인류는 그 순수한 마음을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아 각자의 심연에 간직하고 있다. 교육이란 이 심성을 체계적으로 일깨우는 자극이다.
(2) 비(悲)=카루나(karuna)=compassion(연민)
‘비’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태도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당한 상처나 고통을 함께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거나 제거하려는 마음과 행동이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비참한 상황에 처한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비'는 그런 감정 이상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동일하게 느껴, 그 상대방을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과 행동이다. 영어로 ‘컴페션(compassion)'이다. 미 말은 상대방의 고통(passion)을 기꺼이 함께(com) 나누려는 마음이다. ‘카루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걱정, 근심, 슬픔,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상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관세음보살의 마음은 대자심이 아니라, 대비심이다.
- 상대방의 슬픔에 동참한다.
- 상대방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치를 취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앉아 말없이 그의 슬픈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3) 희(喜)=무디타(mudita)
'희'는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느끼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행복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노력이다. 실제는 카루나보다 더 힘들 수 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겠는가? 상대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 아상(我相, 나가 있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까운 친구, 동료 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의 성공을 시기나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면, 무디타란 숭고한 감정을 소유한 자이다.
4) 사(捨)=우펙샤(upeksha)
‘사’는 버린다는 것으로, 마음에 집착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위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수련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주위에 일어난 유혹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정진하는 의연함과 자신감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갈 뿐이다. 고생 끝에 산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볼 때 느끼는 그 감정이다. 눈앞에 탁 트인 광경이 펼쳐지는 이유는 정상에 올라온 사람의 시선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마음의 태도이다. 그리고 사람의 배경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을 없애는 것이다.그냥 무덤덤하게 대하는 마음은 아니다. '자비희(慈悲喜)'를 모든 존재들에게 평등하게 내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 '사무량심'으로 무장한 사람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속에 쾌적을 유지하는 자이다. "요가 수련자의 마음은 자, 비, 희, 사의 실천을 통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쾌적하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사실 어떤 사건이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없다. 이런 감정들은 그 사건에 대해 나의 반응일 뿐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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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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