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착각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오만에서 나온다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4-07-01 01: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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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개념은 자신이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생각으로 발전하기 위한 정신적 태아일 뿐이다.
-우리는 한 대상을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범주에 강제적으로 진입시키려 한다. 이 강제 진입이 '착각'이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쉬운 건 아니지만, 성공 후에 겪어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성공과 명성은 불안과 함께 온

 

  

어제 <인문 일지>에서 착각(錯覺)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고 그쳤다. 착각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오만에서 나온다.

 

나무들이나 풀, 꽃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을 나와 무관하게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다. 그것들을 나와 상관없는 3인칭으로 내버려 두지 않을 의도이다. 나는 그 것들에게 이름을 하나하나 붙이면서, 그것들에 존재감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개별 것들이 이제 자신의 이름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되는 순간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 몰입하는 인문 운동가이다. 그런 인문 운동가는 자신의 소소한 주변들을 잘 관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관찰한 대상을 자신의 마음속에 잘 안착 시키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안주할 수 있는 범주를 잘 구축하려고 애쓴다. 그 범주에 따라 구별하고 구분한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인문 운동가의 공부이고 지적 활동이다. 주변의 사물들을 관찰하고, 그 대상에 속할 만한 범주를 떠올려, 그 안에 자리를 잡아 준다. 그리고 그 범주 안에 속한 다른 개별적인 대상들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론한다. 그 추론하는 것이 공부이고, 지적인 활동이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음속에 그 대상만이 자리할 유일무이한 개별 범주가 생긴다. 그 독특한 범주를 우리는 '개념'이라 한다. 이 범주를 마련하는 과정이 공부이다.

 

개념을 영어로 'conception'이라 한다. '~와 함께'란 의미를 지닌 'con''장악하다, 포획하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capere'의 합성어이다. '컨셉션'을 어원적으로 말하면, '유사한 의미로 다양한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의 범주로 포획된 추상적인 생각'이다. 그러니까 공부란 세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개념들을 많이 가지는 수련이다. 개념은 자신이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생각으로 발전하기 위한 정신적 태아일 뿐이다.

 

어떤 대상을 응시할 때, 그 대상의 범주를 모른다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에 대한 범주를 공부한 적이 없어 내 마음속에 그 범주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유사한 범주에 강제로 진입시킬 것이다. 그래 중요한 것이 기억이다. 우리는 그 기억을 위해 관찰하고, 그 대상에 대한 범주를 공부하는 거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경험했다 하더라도 건성으로 이해한 사실을,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범주 안에 강제로 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문 운동가의 공부는 컨셉션, 개념을 많이 가지려 하는 수련(修練)이다. 그 개념이 부족하여, 우리는 한 대상을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범주에 강제적으로 진입시키려 한다. 이 강제 진입이 '착각'이다.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한 가지를 찾았거나 찾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착각하지 않는다. 이런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크게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부러움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렴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을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남을 부러워한다. 반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기준을 스스로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인 양 착각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이 고유한 것인 줄 알고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을 모르는 채 어영부영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남을 부러워하는 삶, 남이 소유한 것을 나도 갖고자 하는 삶, 남이 말하는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흉내이다. 흉내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부러움은 정신적인 활동이라면, 흉내는 육체적인 활동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할 때 독창적이며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용기를 내어 자신만의 고유한 선율을 연주해보지만 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협화음으로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고유함에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어서 듣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성과 공명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름다운 선율로 변화한다.

 

부러워하고, 흉내내는 사람들은 '그만하면 괜찮은 마음'의 반대인 '충분치 않은 마음' 때문에 괴로워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인정을 받고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해도 크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미리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준비하면서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성취를 과소평가하면서 자신감을 잃고 서서히 지쳐간다. 그들의 조바심을 이해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저 위선적인 겸손, 특권층의 엄살로 보일 뿐이다.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체념으로, 자신의 열정과 잠재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탓이다. 그게 조바심이다. 그 조바심은 초조함으로 이어진다. 그 초조함은 조급증을 종종 일으킨다. 언젠가 적어둔 글이다.

 

초조하고 조바심을 느낀다든가 성급하다는 것은 부족함과 두려움의 반영이다.

그 까닭에 앞뒤가 맞을 리 없고 손발이 맞을 리 없다.

그 상태로는 도움이 될 리 없고 협력이 될 리 없다.

 

"빨리빨리"가 습관인 자는 실은 가장 늦는 자이다.

입만 빠르고 마음만 바쁘며 정작 손발은 허투르다.

마음과는 다르게 "대충대충"으로 끝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자는 가장 정확한 자다.

빠르게 끝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정확하게 하라.

정확한 자가 냉철하고 여유가 있기 마련이다.

 

고저장단(高低長短)

경중완급(輕重緩急)

경유강약(硬柔强弱)

전후좌우(前後左右)

모두 정확하지 않으면 지닐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지(知止).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이다.

인간사 지혜의 근본은 '지지(知止)'임을 깨달을 것이다.

 

멈출 때를 안다는 것은 부족함을 안다는 것이며,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채워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이다.

채워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생각할 줄을 안다는 것이며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고로 '나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Cogito Ergo Sum. Je pense donc je suis.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누구보다 조바심과 초조함에 시달렸고 그것의 문제를 잘 알았던 작가 카프카는 초조함이야말로 인간의 죄악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두 개의 죄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아마도 카프카의 문학은 이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초조함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초조한 자는 문제의 진행을 충분히 지켜볼 수 없기에 어떤 대체물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해결책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태의 종결은 불가능해진다. 파국을 막기 위한 조급한 행동이 파국을 영속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많은 지름길, 금방 치료가 되고 금방 구원이 되고 금방 개선이 될 것으로 보이는 그런 많은 길이 실상은 비극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우리의 초조함이 닦아놓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나는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또한 철학이라고, 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 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고병권)

 

그 길이 나는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강박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때부터 나는 개인적으로 나름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내가 할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건 틈나는 대로 <인문 일지>를 쓰는 일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발산이 되고, 그 양만큼 수렴하는 시간이 요구된다, 그만큼 독서와 관찰이 시간이 필요하다. 또 그 양만큼 안목과 시선이 높아지고, 세상에 대한 문해력이 늘어난다. 이게 일상의 소소한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또 그만큼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바라보게 되고 마음도 평화로워진다. 더 나아가, 사소한 일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나만의 임무를 깨닫게 되고, 초조함과 조급함이 사라졌다. 나는 이게 인문 운동가의 활동이라고 본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쉬운 건 아니지만, 성공 후에 겪어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성공과 명성은 불안과 함께 온다. 그래서 마침내 타인의 인정과 찬사를 받아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대중의 찬사가 언제 비난으로 바뀔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되는 탓이다. 그리고 어느 수난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시기의 대상이 되다가 급기야는 무리에서 소외된다. 우리는 언제 성공과 명예를 좇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괴로움에 빠진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흡족해할 것이다. 그러나 영광과 명성을 얻고 한때나마 거장의 반열에 올랐던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부단히 증명하려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자신의 라이벌이 그저 자신을 모방하는 아류이거나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제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했다. 예컨대,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그린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에서 영감을 받아 성 아우구스티누스 대성당에 자신의 화풍을 흉내 내어 이사야 선지자의 모습을 그린 라파엘로에게 크게 분노했다. 미켈란젤로는 전도유망한 젊은 예술가에게 위대한 영감을 준 존경받는 대가의 역할에 자부심을 느끼기는커녕, 라파엘로의 예술적 성과가 자신을 모방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 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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