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어두운 날들마저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마음과 실천이 가능해야 진정한 사랑
사랑은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
숲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다 ...
...나무는 단 한 순간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 |
▲사랑은 나무와 같다 |
-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
-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 갈 힘"
오늘 아침은 두 번째 능력인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 갈 힘" 이야기를 해 본다. 김용규 교장이 내리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지극히 간결하다. ‘사랑은 함께하고 싶은 것, 그래서 기꺼이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함께 차 마시고 밥 먹고 영화보고 산책하고 여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함께 살고 싶어 한다. 내 감각이 맞는다면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커플들은 대개 이런 흐름으로 결혼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주는 기쁨의 절반만을 함께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의 또 다른 절반을 함께하고 싶고, 그래서 기꺼이 함께하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그가 싱싱함을 잃고 늙어가는 나날들, 어느 날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 사람 과거의 웅덩이와 그 아픔들, 어쩌다가 그가 삶의 경로에서 넘어져 용기를 잃고 절망에 젖어 흐느끼는 날들, 그에게 찾아온 병마와 그 처절함, 흐려지거나 뒤엉켜버려 내 이름조차 잊어버릴 수 있는 그의 망가지는 기억, 이제는 걷는 것도 불가능해진 몸, 심지어 그 몸에서 배어 나오는 냄새나는 날들…. 이렇게 삶의 어두운 날들마저 함께하고 싶고, 그래서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마음과 실천이 가능해야 그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힘을 갖춘 것이다."
사랑은 나무와 같다. 나무가 자라면 그만큼의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사랑도 사랑하는 만큼 사랑으로 당할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고통을 줄인다고 그림자를 반으로 쪼개려면 사랑을 반으로 쪼개야 한다. 사랑은 고통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고통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려면, 넘어지는 게 무섭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하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안 해 본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면 그만큼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의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순간 끝이 난다. ‘하나'되는 사랑은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모두 혹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전제를 함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그래서 사랑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 ‘둘'의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래 사랑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잔인해져야 자기 사랑을 한다. 조연으로만 있으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예는 주인에게 잔인하지 못한 반면, 주인은 때리기도 하고, 상도 준다. 잔인해 지려면 자신의 품위 지키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야성을 끌어내고 그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생명들과 같다. 김용규 교장에 의하면, 숲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다는 거다. 나무는 단 한 순간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과 평온한 바람과 적당한 비, 그 협조적인 날들을 먹고 자라는 나무는 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마침내 씨앗을 떠나 보낸 뒤 안식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겪어내야 하는 삶의 어두운 측면들, 비협조적인 날들 과도 기꺼이 함께한다는 거다. 더 나아가, 자연의 생명들은 무엇보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내는 삶으로,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다른 온갖 생명을 보듬고 품어낸다. 가을 들 길을 걷다 보면, 때로는 중립적이거나 자신을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파먹으며 해를 가하는 모든 존재들을 나무와 풀은 기꺼이 품어내는 모습들이 장관이다. 이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다운가! 사랑에 관한 진실은 숲이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이고, 생명성의 특징이다.
어제는 오후에 운동을 하고 가을 들판을 걸었다. 가을은 익으면서 비워가는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가 그렇듯 가을을 사는 우리도 한 해의 삶을 여유롭게 수확하면서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사색과 고독의 시간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래 오늘 <가을 노래>를 공유한다.
가을의 노래/김대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 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가을에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그 맑은 마음결에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떠 보낸다
주여! 라고 하지 않아도
가을엔 생각이 깊어진다
한 마리의 벌레 울음소리에
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
잊혀진 일들은
한 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 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산 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사자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란 말 속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로 태어난다. 태어나서 하는 일이란, 배가 부르고 편하면 웃거나 자고 혹은 불편하거나 배고프면 우는 것이다. 동물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거나 자신의 유전자 속에 장착된, 조상에게 물려받는 이기적인 유전자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 , '3 지(知)'이다. 여기서 지식은 주로 정보, 물질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걸로 인간이 누리는 부를 확장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걸 '기술지(技術知)'라 부른다. 지성은 '문명지(文明知)'라고 정의한다. 물질을 알고 부를 확장하면 그걸 어떻게 나누고, 이걸 어떻게 인간 삶에 적용할까, 이 문제가 부각되는데, 그럴 때 관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지성이다. 기술지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지혜이다. 인간은 천지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너머가 궁금하다. 그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지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질문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 영역으로 가면 기술지와 문명지처럼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없다. 거대한 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생명과 우주가 무엇인 가라고 묻게 되면 그 보이는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그걸 지혜라고 부르는데, 동시에 영성(靈性)이라고도 한다. 그걸 인류학적 용어로 쓰면 '자연지(自然知)'이다.
고미숙에 의하면,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알려면 이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의 인드라망 순환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순환을 통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이 결정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인간 다운 앎은 지혜, 영성이다. 그래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기술지와 문명지도 그 활발한 역동성을 갖게 된다. 왜 그런가? 지식은 계속 기술을 확대해서 인간 마음에 소유에 대한 증폭, 곧 욕망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지 게 하는 거다. 이 마음을 해체하는 게 지혜인데, 이 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무조건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다. 한편 지성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많은 시행착오와 토론, 논쟁, 교육 등을 주도하는데, 이 지성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래서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따라서 생각을 통하여, 우리는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는 욕망을 재배치를 하여야 한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 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 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 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 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 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 시켰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교환 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지성을 통해 누군 가와 친해지면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 온다. 그 일상 속에서 소유보다는 사람, 즉 존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서로의 생각이 접속을 한다. 이런 접속을 통해 가치가 생성된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지,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은 유통기한이 아주 짧다. 돈 놓고 돈 먹는 것은 굉장히 유용하고 효율적이지만, 그건 순식간에 다 거덜나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무에서 유가 나와야 가치가 되는 거다. 원래 보이지 않는 지혜에서 물질이 나온다. 이 무형의 자산 없이는 물질만 갖고 돌려 막기를 할 수 없다. 정신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설령 망해도 그 다음에 이 실패에서 뭔가 배우고 도약할 수 있는 베이스를 갖게 된다. 그런 사람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우리는 일상에서 활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접속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폐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과 접속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감각의 차이만 만들어 낸다. 차이의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고 의미가 된다. 반대로 감각만이 늘어나는 게 중독이다.
물론 중독에는 좋은 중독도 있다. 예컨대, 공부에 중독되는 것은 좋은 중독이고, 마약이나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것은 나쁜 중독이다. 공부 같은 좋은 중독은 즐거움의 선순환 고리를 연결해 삶을 재생시키며 생명의 원리를 보이지만, 스마트폰이나 마약 중독은 즐거움은 악순환의 고리를 완성해 궁극적으로 삶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서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의식은 십중팔구 잡념이다. 생각은 잡념을 벗어난 의식의 수준 높은 활동이다.
![]() |
▲ 박한표 교수 |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