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포럼 종합세미나] 제1부 : 2022 한국 정치혁신, 핵심 과제와 해법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1-11-24 23: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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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유영백 정치학 박사(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원)

토론 : 김재득(중부일보 정치부장)
김영호(미디어시시비비 편집국장)
전규열(공감신문 대표이사)

 

[2021세종포럼 종합세미나] -2021.11.18.()

 

1: 2022 한국 정치혁신, 핵심 과제와 해법

 

유영백 정치학 박사(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원)

 

1. 정치의 위기

 

1) 정당정치의 위기

민심과 당심

광장정치

자생적 후보 만들지 못하는 보수

 

2) 정치 실종

정치와 법치

무능의 정치(politics of thinklessness)

 

3) 포퓰리즘

코로나19와 포퓰리즘

21세기의 포퓰리즘

 

2. 20대 대선의 과제

 

1) 민생정치와 통합정치

2) 정의와 공정, 그리고 20대 유권자

 

3. 2022년 정치개혁을 위한 제안

 

1) ‘정치의 회복

2) 개헌을 통한 권력 구조 개편

3) 유권자의 선택

 

 

 

들어가면서

 

한국 정치에 있어 정치개혁이라는 화두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21세기 오늘날에도 한국 정치는 그 길을 정확히 찾아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정치개혁에 대한 논의를 하지만 언제나 한국 정치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2022년 한국 정치는 20대 대선이라는 큰 정치적 행사와 더불어 지방 권력을 선출하는 지방선거가 함께 기다리고 있다. 가히 선거의 해. 향우 4-5년 동안의 국운이 걸려있는 중요한 해다. 특히 현 정권의 실정으로 인한 정권교체의 열망과 여당 내의 새로운 형태의 후보 선출로 인한 정권 재창출이 이전의 대선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내비치고 있다. 정치개혁은 무엇 하나 바꾸고 고치는 작업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치라는 광장에 나선 후보자와 유권자가 상호 교류하고 침투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산물이라 어느 특정의 방향에서만 얘기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2022년 대선을 맞이하고 지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과 해법을, 각 정당에서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에서부터 국민들이 후보를 선택하는 기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의 변화를 통해 찾아가 보고자 한다.

 

 

1. 정치의 위기

 

2022년의 한국 정치는 대선이다.

 

 

1) 정당정치의 위기

 

민심과 당심

국민의힘 홍준표 후보는 민심에서 압승하고 당심에서 지는 희한한 경선이었지만, 그것이 선거의 룰이였기 때문에 깨끗하게 승복한 것이라며 부디 대선은 민심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당심으로 치를 생각은 하지 말고 민심을 따라가는 당심이 되도록 하라며 당원들을 향해 말했다. 과연 민심과 당심은 따로였을까? 국민의힘 후보 선출 방식은 당원 투표 50%에 국민 여론조사 50%를 더하는 것이었다. 홍 후보는 당원 선거인단 569,059명 중 363,569명이 투표했는데(투표율 63.89%), 거기서는 38.82%를 차지했고, 국민 여론조사에서는 6000명이 조사에 응답했는데, 44.73%를 얻었다. 윤석열 후보가 최종 후보로 선출된 것은 극히 정상적인 결과이다. 당원 선거인단 역시 국민의 민심이다. 오히려 만약 여론조사로 결과가 반대였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다.

 

정당은 책임정치를 기반으로 한다. 정당은 선거 때마다 공직 후보자를 선출하여 그 결과에 따라 헌법이 부여한 권력을 이양받으며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 책임을 진다. 따라서 대선 후보는 각 정당이 책임 하에 선출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근간에 와서 국민경선이라는 이름으로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결정 방식을 대개 정당들이 택하고 있지만 그건 정당정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여론조사 방식은 그 자체의 기술적인 문제를 포함함은 물론 상대 지지자의 역선택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어서 결코 바람직한 수단이 아니다.

 

광장정치

이미 인류는 역사를 통해 직접 정치에서 간접(대의)정치로 돌아선 지 오래다. 그럼에도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촛불시위를 통한 광장정치가 일상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정치과정론적으로 퇴보다. 물론 대의정치의 중심인 국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SNS의 발달로 정보의 공유와 국가기관과의 직접적 소통이 가능해진 탓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광장정치는 제도와 시스템으로 가야 할 정치제도가 무분별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국민 대다수가 피곤하다.

 

자생적 후보 만들지 못하는 보수

국민의힘은 지난 26일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최종 경선 룰을 확정하면서 던진 질문은 하나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상대로 누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권교체라는 시대정신이나 나아가 국민의 삶을 지키는 정책과 비전 경쟁으로 결정되어야 할 후보가 오직 선거에서의 승리만을 위해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국민적 지도자 선출이 되어야 할 대선이 자당의 승리에만 국한하는 골목대장을 뽑는 것 같이 매번 선거를 치르면서 반복되는 고질병이다.

 

역대 전통 보수는 스스로 대권 주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대부분 과거 보수 대통령이나 후보는 외부에서 주요 경력을 쌓은 자산으로 대선 후보가 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군에서, 김영삼도 보수와 대척점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이후 3당 합당을 통해, 이회창도 영입 케이스이며, 이명박은 대기업에서 만든 신화였고, 박근혜조차 박정희의 딸이라는 후광이 컸다. 역대 대통령이나 대선후보들을 보면 하나같이 보수당에서 잔뼈가 자란, 다시 말해 보수당이 스스로 키운 그런 후보가 아니었다. 이번도 그렇다. 작년 윤석열이 조국과 대치하면서 대선후보로 부상되기 전까지는 국민의힘 중심의 정권교체는 무망(無望)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보수 정당 정치인들은 보수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보수에 대한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담론이나 설명도 없었고, 보수가 무엇이며 보수의 가치나 도덕을 논하는 것은 어렵고 번거로우니 그냥 닥치고 좌파 공격만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수의 정의는 정치인마다 모호하다. 보수 정치인은 보전을 강조하면서 기득권을 지키는 수구화가 되었고, 이념과 정치적 철학이 빈약하다 보니 그냥 뭉치자뿐이었다. 스스로 대선후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보수는 정권교체기마다 정치적 위기를 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대선후보를 영입한다. 그러나 영입으로 끝나지 않는다. 당의 보수 노선에 신앙 고백적인 요구를 하고 선거 조직을 장악한다. 이렇게 되면 영입 대선주자는 이전의 합리성, 개혁성, 혁신성의 정치적 자산은 차츰 소멸되고 정쟁과 권력의 이전(移轉)만 남는다. 그들의 기득권은 유지될 수 있을지언정 보수가 뿌리내리지도 못하고, 정치는 실종되고 국민의 삶은 피폐해져 가도 진영만 남게 되고 선거 때만 되면 불나방이 되어 이곳저곳을 헤매며 줄서기에 급급하게 된다.

 

정권교체도 하나의 수단이다. 궁극적으로는 이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건강성을 고민하는 지도자의 선출이 중요하며, 그것의 양질화를 담보하는 수단으로써 여야가 있고 정당들이 있는 것이다.

 

 

2) 정치 실종

 

정치와 법치

200717대 대선 당시 검찰이 BBK 주가조작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이 사건에 이 후보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검찰이 발표함으로써 민심은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14년 전 정치검찰은 이명박 후보에게 대통령이 되기 위한 면죄부를 주었지만, 진실은 뒤늦게 공개됐고, 지난해 이 전 대통령은 구속수감됐고 2007년 대선은 흘러간 과거가 돼버렸다. 20대 대선에서도 검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가 주요 변수로 등장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경기 성남시 대장동 비리 의혹으로, 윤석열 후보 역시 본인뿐 아니라 가족과 측근이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수사를 끌다가 두 후보 모두 특검을 수용하게 되면, 11·12월 특검법이 통과되고 특검 임명으로 이어지면 후보의 시간이어야 할 시기에 검사의 시간, 특검의 시간이 될 것이다. 또다시 정치가 소위 법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성남시 대장동의 부동산 개발사업에서 드러난 희한한 사업 설계와 수익 분배 등은 사회 상층부에 속한다는 직업군의 인물들이 모여 행한 것이다. 전직 대법관·검찰총장·특검·청와대 민정수석이 사적 인연으로 투기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들은 전직 검사와 판사다. 칼을 써본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법치란 무얼까? 그들에게 법은 칼이 되고, 그 칼로 법치는 무참히 베어지는 모순을 연출한다. 여야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하는 기득권층 내지는 상류층들, 특히 칼을 가진 자들의 민낯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2008년에 각본이 완성됐지만 낯설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황동혁 감독은 “10여 년 만에 이 말도 안 되는 살벌한 서바이벌이 어울리는 세상이 됐다며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오징어 게임적인 절망적인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우울하다고 했다.

 

투표장에서 내 손으로 도장 찍어 국가의 진로를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경건한 절차가 되어야 할 대선이 여야 후보의 화천대유’-‘고발사주에 대한 검경의 수사 결과로 결판날 수도 있다. 내년 대선도 검찰의 판단이 좌우해야 한다면 거기에 정치는 없다. 정치가 법 선상에서 재단되어야 하는 상황을 종식시켜야 정치가 산다.

 

무능의 정치(politics of thinklessness)

민주화 이후 역대 최저라는 평가를 받는 이번 대선에서 경쟁하는 후보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후보를 범죄자로 단정 짓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감옥에 보내겠다는 식의 말을 서슴지 않는다. 시대 상황에 대한 정의도, 목표와 행동규범도 하나같이 진부하다. 불공정한 현실과 청년세대 미래의 암울함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어떤 불공정이 특히 문제이고, 당장 누구의 어떤 고통을 해결해야 할지, 뒤로 밀린 문제와 당사자에게 어떻게 설득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지 아무런 해법이 없어 보인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과연 수권정당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낯뜨거운 네거티브 공방, 괴문서, 줄세우기 논란 등 경선이 난장판이 되는 가운데서도 지도부는 속수무책이었으며, ‘대장동 게이트실체를 밝힌다며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를 국감장에 세워놓고 역공당한 것도 한심한 일이다. 기껏해야 이 후보가 실실 웃었다고 태도 불량이나 비판하는 수준의 국민의힘에서 수권정당으로서의 능력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진영 싸움과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 불리는 현실에서 정권교체의 국민적 바람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그게 내로남불식이라면 국가적으로나 국민에게 있어 무의미할 뿐이다.

 

선거는 왜 나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한다. 여당의 이재명 후보의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는 온 국민을 무참하게 만들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독선은 불안하다. 대통령을 오래 준비했다지만, 국정 철학은 빈곤하고, 이렇다 할 어젠다도 탄복할만한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실력이 모자라니 정치 공학에 몰두한다. 이슈 선점이나 재난지원금을 늘리는 일, 갈라치기를 통한 내 편의 결집, 줄 세우기 등. 여야 후보 공히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네거티브와 정치적 셈법, 진영논리만으로 대권을 잡으면 금세 길을 잃고, 남 탓만 하는 실패한 정권이 되기 십상임을 우리는 지금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런 생각 없는 정치가 얼마나 큰 비극을 낳았는지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그의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도자의 무사유(생각 없음, thinklessness)’를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무능성으로 설명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하에서 그 많은 목숨을 가스실로 보냈던 책임자 아이히만은 결코 괴물이 아닌 평범한 한 가장이었고 그저 일 범부였음을 간파했을 때 그녀는 악의 평범성에 경악한다.

 

내년 39일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렇게 시시한 대선은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처음이라고 말한다. 호감을 품게 하는 후보를 고르는 선거가 아니라 비호감을 안겨주는 후보를 피하는 선거라는 것이다. 미래 비전과 정책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기보다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에 의구심을 품게 하는 거친 막말과 황당한 행동, ‘생각 없음의 경연장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3) 포퓰리즘

 

코로나19와 포퓰리즘

문 정부는 재정 건전성 악화와 포퓰리즘 정책 등에 대한 우려에도 해마다 예산을 대폭 늘린 것은 물론 한 해도 빠짐없이 추경을 편성하는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쳐왔다. 그 결과 재정 건전성은 극도로 악화됐다. 내년에 국가채무는 1683천억 원으로 사상 처음 1천조 원을 넘어선다. 정부 씀씀이가 현행 추세대로 지속되면 2029년에 국가채무가 2천조 원을 넘을 것이라는 국회 예산정책처 전망이 나왔다. 나랏빚이 2198조 원으로 예상되는 2030년에는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78.9%80%에 육박할 전망이다. 문 정부에서 국가채무가 폭증한 것은 무리한 확장 재정으로, 나랏돈으로 세금 일자리를 마구 늘리고, 코로나19 상황에서 무차별적인 재난지원금과 무분별한 복지에 펑펑 썼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이재명 후보가 전 국민에게 30-50만 원을 주는 6차 재난지원금 지급을 주장하고 나섰다. 1인당 30만 원씩 지급하려면 155천억 원, 50만 원씩 주려면 258500억 원이 든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 수십조 원의 돈 보따리를 풀어 대선 표를 얻겠다는 속셈이다. 이로 인해 막대한 짐을 져야 할 미래 세대는 안중에도 없다.

 

21세기의 포퓰리즘

 

오늘날의 포퓰리즘은 20세기의 인기영합적 포퓰리즘과 달리 기득권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 다른 세력과의 공존도 거부한다. 그것은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상대 정치세력을 악으로 규정한다. 여기에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포퓰리스트 리더와 지지자들 간의 직접 소통을 가능케 한 직거래주의가 결합하여 그 포퓰리즘은 증폭된다.

 

최근 우리 대선 과정에서도 서로를 오래된 기득권세력 또는 새로운 기득권세력이라 공격하고, 상대방과의 공존을 처음부터 거부하며, 자신의 지지그룹에만 메시지를 타전하는 직거래주의가 만연한다. 여론을 형성함에 있어도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신념에 호소하며, 정서와 신념이 진리와 도덕의 자리를 대신한다.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이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런 구도 아래에선 인물의 개별 경쟁력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미래의 권력자원을 놓고 진영 간의 대립은 극도로 격화된다. 그 결과 정치는 공통의 정서와 신념으로 무장한 진영들이 벌이는 권력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전쟁터로 전환된다. 특히 대통령제를 취하는 미국과 한국의 경우 대선은 정권재창출이냐, 정권교체냐의 프레임이 저 홀로 압도적 영향을 발휘하게 된다.

 

 

2. 20대 대선의 과제

 

선거는 시대정신(時代精神·Zeitgeist)을 함축(含蓄)한다. 문 정부하에서의 집값 폭등으로 대변되는 부동산 정책 실패와 일자리 문제는 내년에 들어서는 정부에도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민생 문제와 더불어 해방 직후 해방공간에서 연출되었던 좌우 양극의 첨예한 대립을 방불케 하는 갈라진 국민을 여하히 통합시킬 수 있을지도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두 가지 난제의 밑바탕에 필히 담보되어야 할 것이 바로 공정과 정의다.

 

 

1) 민생정치와 통합정치

 

대권 향배는 민심이 어디로 쏠리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자고로 민심은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을 제일 중히 여긴다. 부동산 실정으로 내 집 마련 꿈을 날리고 절망하는 가정, 생계를 해결할 일자리가 없어 떠도는 청년세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젊은 남녀들을 고통에서 구할 진정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또한 좌우 양극단으로 갈라진 나라를 통합할 비전과 역량을 갖춘 지도자는 누구인가.

 

보수는 변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로는 진보의 독주를 못 막는다. 21대 총선에서 여당의 압승을 가능케 한 표심을 지배한 것은 역시 먹고사는 문제였다. ‘어느 당이 이겨야 내게 도움이 되느냐’. 지극히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이 질문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종합부동산세를 예를 들어보자. 정부·여당은 세율을 0.1-0.8%포인트 올리려고 한다. 야당은 1주택자의 세 부담 상한선을 낮추자는 입장이다. 지난해 종부세를 낸 사람은 59만 명이다. 가족을 포함해도 종부세 영향권은 200만 명쯤이다. 나머지 5000만 명은 올리든 말든 상관없다. 종부세에 관한 한 200만 명만 야당 편이다. 어느 쪽이 선거에서 유리한지는 불문가지다.

 

보수는 서구에선 이미 용도 폐기한 신자유주의에 매달려 있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와 자유시장주의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후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시장이 실패하자 각국 정부가 개입했다. 신자유주의는 설 땅을 잃었다. 코로나 사태는 큰 정부, ()시장, ()세계화 추세를 공고히 했다. 각국은 코로나로 멈춘 시장에 개입하고, 리쇼어링(reshoring, 해외투자의 본국 유턴)에 주력한다. 곳곳에서 배타적 국수주의와 독재의 불길한 그림자가 감지된다. 양극화의 민낯도 드러났다. 게다가 국민들은 성장, 감세, 친기업, 민영화를 외쳤지만, ‘성장하면 정말 내게 과실이 돌아올까. 시장에 맡겨두면 승자가 독식하는 건 아닐까. 노동 유연성을 높이면 해고가 늘지 않을까.’라며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정부·여당은 불안한 민심을 파고들었다. 저성장, 불평등, 중산층 붕괴를 신자유주의와 보수의 탓으로 돌렸다. 총선 압승 이후 이익공유제, 토지공개념 같은 자유시장주의에 반하는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 시장에서 밀려난 많은 국민은 벌써 마음이 끌린다.

 

2) 정의와 공정, 그리고 20대 유권자

 

북유럽에서 부자는 세금뿐 아니라 벌금도 많이 낸다.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의 국가는 교통법규를 위반할 경우 운전자의 소득을 기준으로 벌금을 매긴다. 일수벌금제라고 하는데 위반자의 일수, 즉 하루 평균 소득 절반을 기준으로 위반 내용에 따라 매겨진 범칙금을 곱해서 계산한다. 2002년 핀란드의 노키아의 부사장이 시속 50구간에서 75로 주행해 벌금으로 약 18000만 원을 낸 사례는 유명하다. 스웨덴의 어린이집 비용은 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부모의 소득에 따라 일정액을 내기 때문이다. 같은 곳에서 같은 돌봄을 받지만, 소득이 높은 집은 더 많이 낸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불공정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각자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기여하는 것이 북유럽식 공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미 사회에서 많은 것을 받았으며 자신의 성취를 통해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우수한 교육을 받은 인재, 건강보험, 도로와 인터넷 연결망 등 모든 사람이 낸 세금으로 건설한 공공재와 사회기반 덕에 기업도, 개인도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충실하게 세금을 내어 복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공감대가 있다.

 

대선을 앞두고 여러 가지 공약과 제도가 공정의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소득이나 재산 상태에 관계 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 주는 것이 공정일까?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용적률을 대폭 올리고 각종 세율을 낮추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공정한가? 협력업체는 같은 일을 해도 적은 월급을 받고, 비정규직이 위험한 일을 떠맡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공정한 대한민국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공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민주화 이후 태어난 20대는 보수·진보의 해묵은 진영 싸움에 관심이 적다. 그보다는 기득권의 불공정, 불평등, 부패, 갑질에 예민하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분노하던 20대가 2019년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돌을 던졌다. 대장동 사건에 가장 분노하는 연령도 20대다. 갤럽에 따르면 특검 도입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20대가 72%로 가장 많았다.

 

20대는 또 다른 기득권, 노동조합에 대한 반감이 크다. “노조는 진입장벽을 쌓고,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사는 기득권 꼰대 아닌가요?” 20대는 연금개혁을 외면한 문재인 정부에도 불만이 많다. “우리가 연금을 탈 때쯤이면 바닥날 게 뻔해요. 그런데도 현 정부는 연금을 개혁하기는커녕, 골치 아픈 현안은 적당히 뭉개고, 차기 정부로 떠넘기겠다는 속셈이 보이는데, 이런 게 불공정입니다.”

 

20대는 친시장, 친기업, 감세, 효용 등을 기반으로 한 보수의 금과옥조, 신자유주의에도 회의적이다. 특히 약자를 보듬지 못하는 공감 능력 부족에 반감이 크다. “시장이 잘 돌아가면 잘살 수 있나요? 일자리가 생기나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승자독식의 비정한 시장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내년 대선은 진영 싸움에서 자유로운’ 18-29795만 명(유권자의 18%)이 캐스팅 보트다. 지난 4월 서울·부산시장 선거 때도 20대 표심이 결정적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재명·윤석열 후보 공히 20대에게 인기가 없다. 분명한 건 부패 이미지나 꼰대 이미지로는 20대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3. 2022년 정치개혁을 위한 제안

 

 

1) ‘정치의 회복

 

정치는 진리 싸움이 아니다. 지난한 인내와 타협이 그 요체다. 여야가 있는 것은 서로를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를 더욱 확인받기 위한 건전한 동반자다. 상대는 나의 가치의 절대성을 상대성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파트너요 대안이다. 그러한 존재가 있기에 나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견지할 수 있는 것이다. 좌우 내지, 진보-보수의 개념 또한 상대적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좌일 수 있는 것은 상대인 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역색이 덧입혀져 더욱 고정화되는 병폐를 낳고 있다. 어떻게 한 지역의 모든 계층이 진보요 보수일 수 있는가.

 

국회의원들만의 정치가 아닌 국민들과의 소통 속에서 민의를 반영하는 대의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럴 때 민심이니 당심이니 하는 괴리도 없어질 것이고, 거리의 광장정치도 사라질 것이다. 정당 기능도 정상화해야 한다. 선거 때만이 아닌 수시로 정치신인이나 엘리트들을 충원하고 키워야 한다. 그 층이 깊고 넓어져야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잡음들을 피할 수 있고, 정당의 책임정치가 가능해진다. 정치가 법치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법치는 지극히 정량적이지만 정치는 그것을 넘어 정성적인 것까지 아우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가 경계해야 할 것은 포퓰리즘이다. 단순히 퍼주기식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파탄이라는 염려에서만이 아니라 정당정치를 혐오하고 상대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포퓰리즘적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2) 개헌을 통한 권력 구조 개편

 

이번 대선만큼은 개헌을 통한 권력 구조 개편에 대한 논의는 물론 공약으로 확정 지을 필요가 있다. 현재의 5년 단임 대통령제는 군사독재 시절을 지나오면서 불가피하게 채택되었던 제도다. 1987년 체제가 지금의 급변한 한국사회의 정치를 제대로 보장할 수 없다. 지난 대선에서도 후보자들 간에 토론 내내 얘기가 나왔으나 결국 시간만 끌다 또 5년이 흘러갔다. 이제 과거 군부독재의 권위주의 체제나 양김(兩金)과 같은 민주화 운동을 통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나오기는 어렵다. 극도로 권력이 집중되어있는 우리의 대통령제는 5년 단임에서 오는 선거 과잉과 빠른 레임덕, 그리고 비연속적 정책 추진 등, 지금의 대통령제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다. 대통령 권한의 대폭적인 분산과 4년 중임제를 통한 책임정치를 추구할 때가 되었다.

 

 

3) 유권자의 선택

 

정치인들이 주야장천 싸운다면 그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가 내면적으로 그렇게 짜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회의원과 같은 현실 정치인이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싸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정치 없는 인간 공동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팬덤정치가 사라져야 한다. 절대 지지층은 절대 무능 정치를 낳을 수 있다. 오직 지지층만을 바라보고 정치하기 때문이다. 지지는 옮겨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소통은 정치인들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다. 유권자인 국민들도 소통하고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자기 성찰과 공부를 통해 현명한 지도자를 뽑는 게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한량같은 정치지도자가 필요하다. 농작물의 파종이나 수확 같은 노동의 강제를 면제받는 대신 마을 공동체의 의례를 주재하거나 분란 해결에 앞장섰던 사람이 조선 시대의 한량이다. 원래 경제는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오롯한 정치의 영역은 분명히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 강제의 시대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공동체를 조직으로 전환한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놀이와 축제는 사라지고 오로지 노동의 실행만이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러다 보니 한량들은 사회에서 도태되고 사라져갔다. 한량은 사회적 생산의 유용성 대신에 유희를 선택한다. 그들은 관조적인 휴식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정치에서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팁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 공동체 내에 가졌던 공동체 중재자의 역할이다. 이들이 사라지자 사회갈등은 더 날카로워지고 삶은 더 척박해졌다. 이 같은 성향의 정치인 한 사람이 떠오른다. 바로 YS(김영삼 대통령). 더러 한가함과 여유로, 더러는 결기와 결단으로, 국민들 앞에 섰던 지도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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