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진문공이 짧은 재위 동안 패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분란이 불러온 행운 탓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진문공이야말로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중원의 패자가 되기까지, 그야말로 하늘의 뜻이 비상(飛上)을 부추긴 경우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풍운아이다.
이때 왕실의 천자는 주양왕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불경스럽게 대한 정(鄭)나라 임금 정문공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왕실이라고 해봐야 이미 군사적인 실력은 없이 제후의 나라 중 하나, 그것도 2, 3류에 불과했다. 분을 삭이지 못한 주양왕은 적(赤)나라를 부추겨 정(鄭)을 치게 하였다. 적나라는 붉은 옷을 즐겨 입는다고 해서 ‘붉은 오랑캐(赤狄, 적적)’라고 불리는 남방 융족의 한 갈래이다. 머리에 꿩의 날개를 장식하는 풍습이 있어 ‘붉은 꿩(赤翟, 적적)’이라고 조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천자의 명을 받은 적나라는 얼씨구나 하고 정(鄭)을 들이쳤다. 적(赤)이 정나라의 두 번째 큰 성인 역성(櫪城)을 함락시키고 항복을 받아내자 오랜만에 왕실의 위엄을 찾은 주양왕은 크게 기뻐했다. 마침 왕후가 죽고 없는 데다 적후에게 천하절색 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왕후로 맞아들였다.
적나라 공주 숙외(叔隗, 오랑캐의 둘째 딸이라는 의미)는 어릴 적부터 꽃이나 패물에는 관심이 없고 나무에 올라 새집을 뒤지고 사내처럼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노는 꼴이 여느 공주와 달리 잔망스러워 아버지 적후가 걱정했는데, 자라면서 보니 미모가 빼어났다. 늘씬한 몸매에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며 앵두 같은 입술이 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신하들이 민망해서 눈 둘 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성격은 역시나 활발해서 본격적으로 말을 타고 활 쏘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가 사냥 갈 때마다 군사들과 함께 광야를 달리며 거침없이 자랐다. 무예에 대한 취미도 남달라 비도(飛刀, 던지는 칼)를 잘 썼다. 그녀가 비수를 날리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어김없이 과녁에 꽂힐 정도였다. 다재다능한 그녀는 음악에도 취미가 있어 생황을 잘 불었다. 생황은 악기의 시초라고 알려진 피리의 일종이다. 그녀는 푸른 옥으로 피리를 만들어 자신의 별호를 옥소선자(玉簫仙子)라고 지었다.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이며 예술적 DNA도 있는 여인이 막상 왕후가 되고 보니 궁궐이라는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어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마침 여인의 마음이 공연스레 뒤엉키는 봄날이다. 봄볕 한차례로 초원은 발칵 뒤집혔다. 얼어붙었던 초원에 축축하게 물기가 돌고 어제오늘 아지랑이와 함께 땅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길짐승이나 날짐승이나 암컷들은 하나같이 발정했고 수컷들은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래서 봄? 봄이었던가! 젊은 왕후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정념의 달팽이도 촉촉해진 땅을 뚫고 나왔다. 차마 걷잡을 수 없도록 싱숭생숭해진 옥소선자가 남편에게 보챘다.
“신첩은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즐겼습니다. 화창한 봄날에 궁중에서만 지내자니 괜히 우울합니다. 대왕께선 사냥을 나가지 않으십니까? 한번 따라가고 싶습니다.”
왕은 사랑하는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다 들어주고 싶었다. 일관에게 거북점을 쳐서 날을 잡게 하였다. 신내림을 받은 지 일천(日淺)하여 신기가 영롱한 일관이 정성스럽게 점사를 뽑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뢰었다.
“신령한 짐승인 기린의 암수가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희롱하는 가운데 기쁨이 그득하도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점괘였다. 전통적으로 왕실의 사냥터는 낙양성 밖 북망산이다. 북망산은 왕실과 귀족의 분묘가 산재하여 오늘날에도 ‘황천길 앞산’쯤으로 알려진 바로 그 산이다. 완만한 구릉 위에 숲이 무성하고 군데군데 가파른 바위 절벽까지, 노루 사슴은 물론이고 곰이나 호랑이 같은 큰 짐승이 득실하였다.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허기진 산짐승이 쏘다닐 때라 사냥하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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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그날, 신록 푸른 북망산 사냥터에서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왕의 이복동생인 감공(甘公) 대(帶)였다. 감(甘) 땅을 분봉 받아 감공이라고 불리는데 백성들은 그를 ‘왕실의 둘째’라는 의미로 ‘태숙(太叔)’이라고 불렀다. 그는 선대 주혜왕이 사랑하던 혜후(惠后)의 아들로서 후계 자리를 두고 주양왕과 다투기도 했던 인물이다. 주혜왕은 오히려 태숙 쪽에 마음이 있었는데, 적장자 계승을 주장하는 제환공의 주장에 밀려 왕위는 주양왕에게 돌아갔다.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자 놀기 좋아하는 삼십 대 한량의 주변에 오뉴월 쇠파리 꾀듯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씨름과 노름에다 피리 불기 등 온갖 잡기에 능한 인물들이 득실거렸다.
이날 태숙은 자랑하는 사냥술을 마음껏 뽐내어 가장 많은 짐승을 잡은 장원에 올랐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던가? 그 순간 왕후는 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태숙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젯밤 잠까지 설칠 정도로 이 행사를 기대하다가, 봄 들판에서 젊고 잘생긴 사내를 보고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훤칠한 키, 희멀건 얼굴에다 뛰어난 활 솜씨는 춘삼월 여인의 가슴에 불길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한번 설레기 시작한 두근거림은 쉬이 멎지도 않았다. 왕후는 넌지시 남편에게 말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았네요. 신첩도 한번 말달리고 사냥을 해볼까 합니다.”
왕은 기쁘게 승낙하였다. 왕후가 소매 넓은 겉옷을 벗어부치는데, 미리 그 안에 푸른 경장을 입고 있었다. 미끈한 팔을 들어 전통을 차고 금칠 입힌 활을 잡더니 성큼 일어섰다. 가벼운 옷차림의 왕후는 적족(赤族) 특유의 굴곡진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 보는 이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왕도 눈이 부신 듯 새삼 자신의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틈엔가 시녀들이 왕후가 사랑하는 황표마(黃驃馬)를 끌고 나타났다. 황표마는 그녀의 친정에서부터 따라온 말로서, 누런 몸체 바탕에 듬성듬성 검은 점이 박힌 늘씬한 짐승이다. 주로 마구간에 갇혀 지내다가, 오랜만에 야외에 나온 말은 삭신이 쑤시는지 뒷발로 땅을 차며 힝힝거렸다. 아름다운 여주인을 보고는 등허리를 부르르 떨며 잇몸을 드러내고 웃는다. “히히히이이잉,”
푸르르 콧소리 끝에 수컷의 누린내가 훅 풍겼다. 왕후가 그런 녀석의 목덜미를 가볍게 토닥거리고 왼발을 등자에 걸치더니, 훌쩍 다리를 뻗어 말 등에 올라탔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와아 탄성을 질렀다. 시녀들도 연녹색의 경장 차림이다. 그들도 성큼성큼 말에 올라탔다. 한창 봄물이 올라 터질 듯이 육감적인 여자들이 말 등에 오를 때마다 사람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여자들이 막 출발하려는데 왕이 말했다.
“기다려라! 왕족 중에 누가 왕후를 보호하여 따라가겠는가?”
태숙이 벌떡 일어났다.
“신이 왕후님을 모시겠나이다.”
그야말로 왕후가 바라던 바였다. 그녀는 태숙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면서 말고삐를 잡아채고 박차를 가했다. 여자들이 신록의 북망산 기슭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왕후가 아아아!‧‧‧ 몸 밖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안으로 눌러 넣으면서 고삐를 당겨 잡는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몸은 꿈틀꿈틀 살아서 떨리고 있었다. 박차를 지르지 않아도 황토마는 제 신명으로 콧바람을 쏘아대며 달렸다. 네 굽이 동시에 땅을 차고 나갈 때 말은 요란한 방귀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호응하듯이 기수가 꼿꼿이 두 다리를 세우고 일어섰다. 등자를 힘차게 밟고 꿈틀거리는 말의 등허리 근육을 허벅지 안쪽으로 조이면서 ‘이랴, 이랴’ 고삐를 당기고 늦춘다. 태숙도 무서운 속력으로 왕후를 따라잡았다. 달리는 중에도 여자는 사내를 곁눈질하면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남녀는 서로 상대를 의식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갖 솜씨를 다 부리다가 마침내 산기슭을 감돌아 계곡에 이르렀다. 여자가 고삐를 당기자, 말은 히이힝… 길게 울면서 멈춰 섰다. 바로 곁에서 흘레붙던 암꿩과 장끼가 놀라서 푸드덕 날아오르고, 서너 걸음 밖에는 춘정에 몸이 다급해진 암비둘기가 세상없이 앓는 소리를 내며 꺽꺽거린다. 태숙도 급히 말을 세웠다. 종일토록 땀을 흘린 태숙에게는 곰삭은 땀 냄새가 풍겼고, 입 냄새도 탁했다. 비 오는 날 수캐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왕후는 문득 몸의 빈자리를 느끼면서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진즉에 왕자의 재주를 사모했는데 오늘에야 솜씨를 봤습니다.”
여자는 가지런한 잇바디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는실난실 한쪽 눈을 찡긋하는 교태를 보였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웃음에는 수줍음이 묻어 있었다. 태숙은 여자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신이야말로 천상의 선녀가 말 타는 자태를 처음 보았습니다. 종종 가르침을 바랄 뿐입니다.”
종종 가르침이라는 말에 왕후는 무슨 연상이 들었는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연정을 감출 수 있는 얼굴은 없다. 남녀는 이미 사모니 가르침이니 하면서 속마음을 내비친 후라, 부엉이가 울면 올빼미가 화답하듯이 한결 스스럼이 없었다.
“왜 날 따라왔나요?”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다 태숙은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여자가 해실해실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무안한 김에 대나무 뿌리 말채찍으로 자신의 비파형 허벅지를 탁탁 치다가 아예 터놓기로 작정하였다.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궁색한 변명이군요. 내일 일찍 태후 궁으로 문안을 드세요.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이후 그들은 고라니와 사슴을 쫓아 산야를 헤매면서 기분 좋은 땀을 흘렸다. 젊고 싱싱한 여자의 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 사냥터는 음모도, 사랑도 무르익는 공간이다. 고구려의 무용총 수렵도나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보듯이 인류는 주로 사냥을 통해 고기를 얻었다. 이 대륙에서는 노루 고기를 깨끗한 흰 띠 풀로 싸서 연인에게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물은 남녀의 관계를 좋게 한다.
들판에서 잡은 노루 고기 야유사균 (野有死麇)
흰 띠 풀로 싸서 주고 백모포지 (白茅包之)
봄 그리는 아가씨를 유여회춘 (有女懷春)
봄 총각이 유혹하다 길사유지 (吉士誘之)
숲속의 떡갈나무 임유박속 (林有樸樕)
들판에 잡은 사슴 고기 야유사록 (野有死鹿)
흰 띠 풀로 묶어주니 백모순속 (白茅純束)
아가씨 옥같이 아름답다 유여여옥 (有女如玉)
천천히 가만가만 서이태태혜 (舒而胎胎兮)
내 앞치마 만지지 마세요 무감아서혜 (無感我帨兮)
삽살개 짖게 하면 안 돼요 무사방야폐 (無使尨也吠)
공자의 《시경》, 〈국풍〉 중 소남(召南)편,
‘야유사균(野有死麏, 들판의 노루)’
어느 봄날, 싱숭생숭 마음이 달뜬 여인이 들판에 나왔다. 기다리던 사내가 흰 띠 풀로 싼 노루 고기를 선물하고 수작을 건넨다. 기어코 그녀의 앞치마를 슬며시 들추는데 삽살개가 짖는다? 시경의 서두를 장식하는 ‘물수리’ 시에서는 여성의 삼각주에 사는 물수리 울음소리를 그렸는데 이제 또 삽살개가 짖는단다? 여인의 치마 속에는 물수리가 울든지, 삽살개가 짖든지 뭔가가 있기는 있다.
시(詩)는 생략된 절제와 침묵에서 나온다. 탁 잠긴 봄날의 오후, 아지랑이 난무하는 들판에서 그녀가 기대한 것은 오직 노루 고기뿐이었을까? 어쨌거나 오늘 낮에 두근거리던 가슴은 밤이 깊도록 진정되지 않았다. 옥소선자는 미끈한 다리를 배배 꼬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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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완 (韓 莞) 작가 |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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