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홍성 삼당시인 이달 시비

이영 기자 / 기사승인 : 2021-04-08 12: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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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따라 구름 따라 유랑하는 삶을 살았던 시인

▲홍성군청 옆 홍주성터에 세워진 손곡 이달의 시비.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에서 태어났다. 양반인 아버지와 홍주관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서얼로 출생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고 강원도 원주 손곡에 은거하여 살면서 빼어난 시편들을 남긴 ‘삼당시인’이다.

「시골밥집 젊은 아낙네 저녁거리 떨어져서

비 맞으며 보리베어 숲속으로 돌아오네

생나무에 습기 짙어 불길마저 꺼지도다

문에 들자 어린아이들 옷자락 잡아다리며 울부짖네」

 

손곡 이달(李達 1539~1612)의 시 <보리를 베며(刈麥行)>이다. 밥, 봄, 비, 보리, 아낙네와 아이들, 이런 시어들이 곤궁한 삶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손곡의 시는 말하지 않고 보여준다. 16세기 말 두 번의 왜란으로 피폐해진 현실을 그린 작품이 많은데 이 시에서도 남자의 자리는 징병으로 비어 있는 듯하다. 손곡은 직접적인 비판과 분노보다는 한 정경을 비춰줌으로써 정화수에 먹물이 퍼지듯 애잔한 감정이 배어들게 한다.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고려말 문장가)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미천한 기생이었으므로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원주 손곡에 살면서 그것으로 호를 삼았다. 젊었을 때 읽지 못한 글이 없었고…’ 허균이 스승의 이야기를 쓴 <손곡산인전>의 서두다.

 

▲홍성군청 뒤편의 여하정. 1896년 관찰사 이승우가 세운 것으로 고목과 연못과 정자가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고 있다. 이 덕분에 홍성군청은 문화재로 둘러싸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손곡은 양반 아버지와 홍주(지금의 홍성)관기 사이에서 서얼로 태어났다. 일찍이 문과 응시를 통한 벼슬길은 막혀 있었고,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를 통한 기술직 입신도 포기했다. 특별한 직업도 없이 산천을 유랑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의 재주는 오직 하나, 시를 짓는 것뿐이었다. 서얼의 울분을 시를 통해 토해냈다. <문선>·<태백>·<성당 십이가> 등의 시집을 통으로 외웠고, 특히 소동파의 시를 뼛속까지 터득하여 한번 붓을 들면 그 자리에서 수십 편의 시를 쏟아냈다고 한다. 원주 손곡에 은거해 살면서 친구인 허봉의 권유에 따라 그의 동생들을 가르쳤으니, 허난설헌과 허균이다. 허균은 스승 손곡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홍길동전>을 쓰게 된다. 손곡은 한때 한리학관이 됐지만 이내 사직했으며, 중국 사신을 맞는 종사관으로 잠시 일한 것이 관직의 전부다. 

 

손곡은 송시(宋詩)를 주로 지었다. 그러다가 서경덕의 문인으로 훗날 영의정에 오른 사암 박순을 만난 이후 당시(唐詩)로 돌아선다. 박순이 “시의 도는 마땅히 당으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네. 소동파가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 것일세”라며 이태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여주자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손곡마을로 돌아와 책을 엎드려서 외웠다. 밤을 낮 삼아 무릎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기를 다섯 해나 계속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밝아져서 마치 무엇을 깨달은 듯싶었다. 그래서 시를 지어 보았더니 시어가 매우 맑고도 적절해서 옛날의 모습을 깨끗하게 씻어버렸다. …그는 시를 지을 때 말 한마디까지도 갈았으며 글자 하나까지도 닦았다. 소리와 율도 알맞게 갈고 닦았다.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달이 가고 해가 가더라도 고치기를 계속했다’ 허균은 손곡이 시를 공부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옛 홍주읍성의 바깥문 홍주아문이다. 홍성군청 자리가 홍주성지여서 군청 입구에 세워져 관청의 출입문 역할을 하고 있다.

송시는 머리로 쓴 시이고,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라고 한다. 송시는 고사와 전거를 인용하며 말하는 것이라 하고, 당시는 느낌과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한다. 조선후기 문신 신경준은 ‘시칙(詩則)’에서 “시의 작법은 영묘(影描)와 포진(鋪陳)을 벗어날 수 없다”면서 “당인은 광경을 즐겨 서술하여 영묘가 많고, 송인은 의론 세우기를 즐겨하여 포진이 많다. 당인은 시(詩)를 가지고 시를 지었고, 송인은 문(文)을 가지고 시를 지었다”고 했다. 영묘는 그림자를 묘사한다는 뜻이고, 포진은 그대로 펼쳐 진술한다는 말이다.

 

「꽃 피자 가지마다 나비 많더니, 꽃 지니 나비는 보이지 않네. 다만 저 옛 둥지의 제비가 있어, 주인이 가난해도 돌아왔구나」 이것은 당시다. 봄날은 무상하되 빈가(貧家)에 제비 돌아오는 것을 보고 한 감흥이 일어난다. 시인은 보여줄 뿐 더 나아가지 않고 다음을 독자의 몫으로 넘긴다.    

 

「미친바람 뽑아서 거꾸러지니, 뽑힌 나무뿌리까지 드러났구나. 그 위의 몇 줄기 등나무 넝쿨, 푸릇푸릇 여태도 모르고 있네」 이것은 송시다. 광풍에 쓰러진 나무 위로 넝쿨이 푸른 싹을 내밀고 있다. 이것을 생사가 윤회하는 자연의 순환으로 읽으면 당송이 비슷해지지만, 이미 실각한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모리배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읽으면 송시가 된다. 당시는 보여주고, 송시는 말하고 있다.(정민, 한시미학산책)

 

▲홍주성지 둘레길. 손곡 이달에 대한 설명과 홍성 출신 한용운 시인과 김좌진 장군에 대한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시의 사조를 바꾼 손곡은 당시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렇게 하여 열댓 편이 지어지면 여러 시인들 앞에서 읊어보았다. 모두들 기이하다고 감탄하였고, 최고죽과 백옥봉까지도 “그를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시는 기운이 따사롭고 지취가 뛰어나며 빛이 곱고 말이 담담하다. 그 온화함은 봄볕이 온갖 풀을 덮은 듯하며, 그 맑음은 서리 같은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흐르는 듯하고…이달의 이름은 이로부터 우리나라를 흔들었다’(손곡산인전) 최고죽은 고죽 최경창이고 백옥봉은 옥봉 백광훈이다. 손곡 이달과 함께 이 세 사람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부른다.

 

「오동꽃잎은 밤안개 속으로 떨어지고/ 바닷가 나무 위엔 봄 구름만 떠 있구나/ 풀밭에서 한잔 술로 헤어지지만/ 서울 가는 길목에서 다시 만나겠지」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조선 최고의 오언절구’라고 격찬한 손곡의 <별이예장(別李禮長)>이다. ‘외로운 감정을 뛰어나게 묘사했다’는 허균의 말처럼 봄날 강릉에서 벗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정한을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담담하게 그려 넣었다.

 

서얼로 출세해 나아가지 못한 처지를 괴로워하면서 세상과 유리되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유랑하는 삶을 살았던 손곡, ‘산하를 헛되이 왕래한다 탓하지 마오. 보잘 것 없으나마 새로운 시 얻어 비단주머니에 가득하다오. …백가지 계획으로 생을 도모했으나 상책이 없으니 몇 편 시로 번민을 물리치고 글을 쓴다’고 고백하고 있다.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살다가 평양의 한 객관에서 생을 마쳤다. 무덤은 전하지 않으며, 홍성군청 앞과 원주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보리를 베며>는 그 두 시비에 새겨져 있다. 문집 <손곡시집>이 전한다. 허균이 저본을 수집하고, 아들 이재영이 편찬해 1618년경 간행한 초간본으로 한시 330여 수가 실려 있다.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살다가 평양의 한 객관에서 생을 마쳤다. 무덤은 전하지 않으며, 홍성군청 앞과 원주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새겨진 시는 그의 걸작 <보리를 베며>.

「흰둥이 앞서가고 누렁이 뒤따라가는데

들밭머리 풀섶에는 무덤들 늘어서 있네

제사를 마친 늙은이 밭 사이 길로 들어서

아이 부축 받으며 저물녘 취해 돌아가네」    

시 <제사를 마치고(祭塚謠)>이다. 할아비와 손자가 제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술에 취한 할아비를 손자가 부축해서 걷고 있다. 3대 중에 가운데 남자가 없다. 그는 전쟁에 나가 돌아와 무덤이 되었다. 우리 한시의 백미로 꼽히는 손곡 이달의 걸작이다.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

▲이광이 작가

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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