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오후 4시의 그녀 -허여경 소설집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1-05-22 0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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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내음 듬뿍 담긴 순정한 인생의 번뇌를 거칠게 그려낸 드로잉
주인공들은 대개 비극 속에 살면서도 끝내 비관하지 않는 억센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작품 해설]

- ‘날것내음 듬뿍 담긴, 번뇌하는 인생 드로잉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이란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과연, 예술은 세계와 지역·인종을 넘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동일한 감정으로 결합해온 인류를 행복으로 이끄는 활력소다. 여기에서 동일한 감정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하다. 작가가 독자에게 건너가는 유일무이한 사다리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 영역에 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인간의 사랑을 말하지 않고, 인간의 사랑을 존중하지 않는 문학은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한다. 허여경의 작품은 정직한 사랑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다. 그 서술과 묘사가 때로는 너무나 날것이어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러나 투박하고 싱싱한 언어의 매력이 허여경 문학의 독창적인 특성으로만 농익을 수 있다면 머지않아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허여경 소설집 오후 4시의 그녀는 싱싱한 내음 듬뿍 담긴 순정한 인생의 번뇌를 거칠게 그려낸 드로잉이다. 작품들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번뇌하는 인간군(人間群)의 에피소드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8편의 작품 모두 성공적으로 살아간다고 인정하기엔 결격사유가 있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하나같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번민의 화톳불을 하나씩 안고 비틀거린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대개 비극 속에 살면서도 끝내 비관하지 않는 억센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가슴속 고백을 거침없이 쏟아놓는다. 화자들은 가식이 없는 진솔한 화법으로 살아있는 삶의 이야기들을 경계하지 않고 끈적하게 토하거나 비명을 지른다. 별스럽게 꾸미지도 않고 꾸미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작가의 메시지를 흥건하게 녹여낸다.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가깝고 먼 이웃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쉬운 듯 기어이 쉽지 않은, 축축한 고백들을 읽으며 가슴이 젖어 드는 미묘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

 

 

진주의 사랑

미혼모 이야기다. 아이를 홀로 낳아서 기르는 엄마의 애틋한 일상이 잘 그려져 있다. 미혼모에 대한 터무니없는 편견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잔잔하다. 그 처절한 삶의 내면을 조금만 이해해도 세상이 그렇게 그들 인생에 대해서 가혹한 편견을 갖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철없던 시절 한순간의 실수로 고난의 인생을 살아내야만 하는 미혼모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꿋꿋이 살아낸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는 설정도 훈훈하다.

 

부모가 험악한 사랑과 전쟁을 지속하는 가정에서 자란 불우한 여성 진주는 열아홉 살 고등학생 시절 자신의 외로움을 파고든 성진이라는 남자와의 하룻밤 풋사랑으로 임신을 하게 되면서부터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들 지호와 함께 억척스럽게 살아가던 중에 우연히 최우진이라는 남자를 알게 된다. 그리고 SNS를 통해서 그의 내면을 알게 되면서 한없이 빠져들어 간다. 남자는 상처(喪妻)한 이후 모친과 함께 생활하는 은행 직원이다. 진주에게 대시해오는 최우진 역시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무도회(This masquerade)

사이버 세계에서 일어나는 아주 독특한 사랑 이야기다. 주인공 엔도는 파라과이로 갔다가 다시 멕시코로 옮겨가서 정착한 교포다. 청바지 판매업을 하는 주인공은 인터넷을 이용한 가상공간 음악 방에서 리야(닉네임)라는 한국 여자와 만나 친해지고 깊은 사랑을 나눈다. 엔도와 리야는 멕시코와 한국이라는 엄청난 공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애정을 흠뻑 나누는 가상의 사랑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가상과 현실이라는 괴리가 빚어내는 한계로 인해 두 사람은 갈등하게 되고, 엔도는 깊은 질투심에 가상 인물까지 만들어 리야의 음악 방에 투입하며 흔들린다. 그러던 끝에 홀연 리야가 사라지고 엔도는 오랜 세월 그녀를 그리워한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아예 이루지 못하거나,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신기루처럼 변해버리는 게 우리 인생의 솔직한 단면도가 아닐까. 작가가 하고자 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고백을 느끼게 한다.

 

끌림에 관한 명상

이 소설은 독특하다. 통상적인 스토리 구성을 벗어나 이별을 겪은 뒤 일어나는 미련을 포함한 오만 가지 상념의 흐름을 중언부언 곱씹는다. 화자는 JIN이라는 여성과의 사랑이 끝났을 때, 휘몰아치는 후유증 때문에 흔들리는 내면의 세계와 방황의 흔적들을 토로한다. 그리고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적 끌림에 관한 사유와 상념의 꼼꼼한 기록에 천착하고 있다.

 

방황과 집착의 늪에서 헤매면서도 좀처럼 내면의 후회를 깊숙이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하리만치 늘어지는 미련의 그 끝에서 새로운 이성을 만나는 순간 모든 게 옮겨가는 끌림의 기적에 대해서 작가는 숨김없이 변론한다. 이렇게 가벼운 변심이 어디에 있나, 하고 실망할 즈음에 다시 돌아보면 독자들은 작가의 설정에서 아무도 마냥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내면을 맞닥트리게 될 것이다. 그게 곧 진실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부끄러움의 영역에 있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다.

 

은이의 네버랜드

정신병을 앓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자연현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는 일상에 늘 존재한다. 그 사실을 무작정 부인한다면, 그건 아직도 세상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는 정신분석 세계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은 줄곧 일어나고 있다. 단지 그것이 상식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런 선입관을 정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설 속 14천 년 전 마고 문명 이전의 역사가 바로 무제국(巫帝國)’이었다는 주장도 있지 않은가.

 

작가의 경험이 깊숙이 녹아있는 이 작품은 불가항력으로 무병(巫病)을 앓게 되는 주인공 은이와 그를 중심으로 그 가족들이 겪게 되는 이야기들을 휴머니즘적 시각에서 펼치고 있다. 주인공은 운명적으로 닥쳐온 시련을 견뎌내어 기어이 해피엔딩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한생을 버겁게 살아내는 어느 특별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흐뭇한 소설이다.

 

오후 4시의 그녀

결혼 생활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중년 남녀의 허망함과 생활인으로서의 애환을 교직한 소설이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남녀가 시장에서 만나 함께 장사를 다니게 되고 자연스럽게 내연관계로 발전한다. 그 이면에는 서로 맞지 않는 짝을 숙명처럼 만나 어긋난 결혼 생활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각자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세세하게 묘사된다.

 

거짓말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작가의 작품 중에서 특히나 솔직한 소설이다. 다들 드러내지 않고 살아서 그렇지 참으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진실 따로, 현실 따로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후회하기에도, 새로 시작하기에도 너무 늦은 그런 인생에 대한 진솔한 언어들이 돋보인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그렇게 오후 4시쯤에 다다라, 끝내기도 다시 시작하기도 애매한 시간을 열심히 사는, 부지기수 인생들에 대한 다사로운 시선이 곱다.

 

수선화 핀 마당가에서

사업에 실패한 한 무른 사내의 실패담이다. 의류 사업으로 큰돈을 벌기도 했던 주인공은 회계 관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망하게 된다.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접근한 후배의 꼬드김에 그만 그는 다단계 사업에 휘말린다. 애초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일에 뛰어들었던 그는 갈팡질팡하는 중에 꽃뱀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는 등 낭패를 당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은 아내였다. 서울 아파트를 처분하여 빚을 청산하고 평소에 소망하던 마당이 있는 시골집으로 옮겨가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인간의 욕망을 노리는 다단계 사업 범법자들과 희생자들의 허황된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고난을 끝내 감싸 안는 가족의 사랑을 치열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랑, 그게 뭔가요?

이 소설은 기이한 삼각관계에 빠진 청춘남녀들의 젊은 날 질풍노도 같은 사랑 이야기다. 멋진 간호사인 미숙은 창훈이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창훈에게는 동훈이라는 이름의 죽마고우가 있다. 셋이 함께 만나는 날이 잦아지면서 운명처럼 미숙은 동훈에게 빠져든다. 치밀하고 이성적인 창훈과 달리 동훈은 감성이 풍부한 또 다른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결국은 창훈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미숙은 동훈과 새로운 연인 관계를 시작한다. 뭔가 늘 불안한 기색인 동훈이 부모님 댁의 일이라며 금전 고민을 털어놓고, 미숙은 카드 대출 방식으로 천만 원의 거금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동훈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도박에 빠져서 무질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미숙은 자살을 시도한다. 위기의 순간에 창훈이 찾아와서 미숙을 구해준다. 지극한 사랑에 감동한 미숙은 창훈의 사랑을 다시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곧바로 결혼한다. 하지만 꼼꼼한 성격의 창훈은 머지않아 의처증에 빠지고 증세가 점점 심화한다. 한번 배신했던 미숙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창훈은 좀처럼 의처증을 극복하지 못한다. 결국 미숙은 창훈을 떠날 결심을 한다.

 

얼핏 가벼운 이야기로 읽히지만, 이 작품 역시 우리 주변에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연을 담고 있다. 변화무쌍한 사랑의 변주곡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난해한 법이다.

 

엇박자

실패한 결혼과 좀처럼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뭔가 다른 길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비극적 상황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잘생긴 남자 준호를 선택한 주인공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남자는 인물값을 하듯 계속 바람을 피운다.

 

답답한 일상을 탁구장에서 게임 파트너로 만난, 자상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석중이라는 남자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아내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입원해있다는 석중을 만나 운동을 함께하고 음식을 같이 먹기도 하는 시간이 좋다.

 

어떻게든 가정을 깨지 않고 준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주인공은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이지만 실패로 끝난다. 입버릇처럼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그와는 서서히 종점으로 치달아 결국 이혼 절차를 밟게 된다.

 

주인공은 오랜만에 탁구장에 나가서 석중을 만나려고 하는 데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석중에게 전화를 건다. 웬 낯선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가까스로 만난 석중은 대수롭잖은 듯이 저에게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에요. 지금은 저하고 같이 살고 있어요.”하고 전화를 받았던 여자의 정체를 밝힌다. 세상에는 제 박자에 딱딱 맞춰서 살아가는 사람보다 그렇게 엇박자 속에서 위태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하고 싶어 한 것으로 읽힌다.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아무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타고난 재주가 있다고 해도 뜻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작가로서의 끈질긴 예술가적 욕망이 그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치열한 성찰은 필수 요소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로서 허여경의 태도는 매우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시인 황동규의 말을 잠깐 빌리자. 그는 자신을 작가로 살게 하는 이유를 최대 노력으로 최소 만족, 그 바보스러운 매력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자신의 문학을 한 번 들어간 후 지금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골목에 비유한다. 그러나 그가 끝내 강조하는 것은 문학 골목에서 확실한 것은 그 길이 절대로 막다른 골목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허여경 소설집 오후 4시의 그녀는 그가 도저히 출구를 찾지 못할 문학 골목으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독자들은 이 작품집을 통해서 작가가 그 골목길을 절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구보다도 작가로 살기를 소원하는 허여경에게 이번 출판은 대단히 많은 의미를 지닌다.

 

이 소설집 발간을 계기로 그가 또 다른 차원의 내공을 갖춘 훌륭한 작가로 거듭나리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길만이 첩경인 글쟁이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노력하는 작가로서 변함이 없이 살아가기를 당부한다. 이제 비로소, 좀처럼 출구를 찾기 힘든, 그러나 결코 막다른 골목은 아닌 문학이라는 골목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허여경 작가의 작품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해 마지않는다.

 

안휘(소설가·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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