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朴東)-03] 상주(商周) 목야전쟁과 상나라의 멸망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4-17 23: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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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    [그림] 상주 목야전쟁에서 주나라 연합군의 완승 장면

   

동이족 상()나라는 약 600여 년간 중원을 지배했다. 그런데 기원전 1046년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 인근의 목야(牧野)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주나라 무왕에게 대패하면서 멸망 당하고 만다. 당시 상나라는 모든 면에서 주나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나라가 패배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동이족과 화하족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일삼아 민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수많은 동이족들이 주나라에 가담하여 상나라를 멸망시켜 버렸다.

 

상나라가 수세로 몰리게 된 가장 큰 이유로는 바로 인신제사를 들 수 있다. 상나라는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살아 있는 사람을 공양했다. 안양에서 발굴된 무정의 황후 부호묘에서는 수많은 갑골문과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끔찍한 사실들이 숨어 있었다. 상나라 말기에 동이족인 노씨 세력은 하남성 노씨현에 머물고 있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상왕이 노씨들의 지도자인 노백(卢伯)을 죽이고, 그 두개골을 따서 각사를 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노국(盧國)은 중국 서쪽의 강방(羌方)에 속한 나라였는데 무정왕 시기에 상나라에 귀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사에 사용할 인신이 부족해지자 왕후인 부호가 직접 상나라의 여성 대장군으로서 13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방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가해 노씨 중 다수를 인신제사용으로 포획하였다. 당시 강방은 상나라의 사람사냥에 맞서 상나라와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상나라 말기에 노국은 상왕조와 깊은 원한관계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텐센트망의 기사(2019.08.13.)에는 한 편의 복사 기록에 ‘..........'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확실치 않으나 경악스럽게도 이 복사가 노백의 두개골에 새겨져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점술의 재료는 주로 거북의 등껍질을 활용하는데, 동물의 견갑골, 두개골, 예를 들면 소머리, 사슴머리, 호랑이뼈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사람의 두개골을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를 인두각사라고 한다. 사람 두개골에 글을 새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적국의 주요 우두머리나 방국 족장에 대한 원한을 표현한다. 이처럼 두개골에 글자를 새기거나 술잔 등으로 사용하는 일은 은상 시대에 유행했던 풍습이다. 이를 헤드헌터라 부르기도 하는데, 적국 지도자를 참살하고 그 두개골을 가져다가 이면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상나라 말기에 노국은 주저하지 않고 주() 부족과 연합하여 목서팔국(牧誓八國)'의 일원이 되어 상왕조에 복수를 하게 된다. 여기서 목서팔국은 주무왕을 따라서 상왕 주()를 토벌한 8대 제후국을 가리키는데, 상서·목서에 따르면 용국(庸国)촉국(蜀国), 강국(羌国), 무국(髳国), 미국(微国), 로국(卢国), 팽국(彭国), 복국(濮国)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남성의 노씨족과 나씨족, 산동성의 래이족, 하북성의 려(), 회하 유역의 동이족 등 수많은 동이족 나라들이 목야전투에 앞장섰다.

 

이와 관련하여 춘추좌전소공 11년조에는 상나라의 주()왕이 동이에게 승리하였으나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주왕의 주력군은 동이족을 치러 동북으로 나갔다가 동이 세력의 완강한 저항으로 오랫동안 동북부 작전에 함몰되어 상나라 내부가 허전해지고 만다. 그 결과 상나라의 많은 인력과 물력이 소모되었다. 사기주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1046년 주나라는 연합군 45천 군대를 이끌고 상나라의 허를 찌르는 공격을 감행한다. 지금의 안양 은허 아래쪽까지 파죽지세로 동진하면서 올라온 것이다.

 

목야전쟁(牧野之战)에서 상나라 군대는 70만 대군으로 주나라 연합군을 막아보려 했지만 비간의 심장을 열어보고, 기자를 감옥에 가두었으며, 미자를 쫓아내는 등 충신에 대한 박해로 민심이 이반하고, 다수 노예군이 도주하거나 창끝을 돌렸으며, 주나라 강태공의 치밀한 전략 전술 등이 맞아떨어져 패망하고 만다. 그 결과 50만 명이 넘는 상나라 사람들이 죽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상의 주()왕은 자결했다.

 

이에 수많은 동이족들이 주나라의 성립을 축하했다. 대표적으로 식신, 즉 조선이 축하 사절을 보낼 정도였다. 이것은 주나라가 동이족의 힘으로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 당시 주나라의 정정은 매우 불안하였고, 동이족들이 결집할 경우 주나라는 생존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리즈 4편에 계속됩니다

 

 

▲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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