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파직 원인은 원균 모함이 아니라 요시라의 공작때문"

김영호 기자 / 기사승인 : 2019-12-06 22: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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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 발간 『조선사』에서 원균 모함으로 조작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 하옥된 것은 원균의 모함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주된 원인은 이중간첩 요시라의 공작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중간첩 요시라의 거짓된 정보에 국왕 선조가 속아 넘어가서 충무공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충무공이 그 명령에 불응한 것이 파직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지난 12월 4일 흥사단에서 흥사단 독도수호본부 주관으로 개최된 독도역사왜곡학술세미나에서 前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정태상 연구교수는 이같이 주장하고 그 핵심 근거로 1597년 2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을 제시했다.
 

▲ <그림 1>충무공을 유인하기위한 거짓된 정보의 전달 경로.  충무공이 왜적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선조의 출전명령에 불응하자, 충무공을 파직,하옥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 정유(1597) 2월 1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하옥시키라 명하고, 원균(元均)으로 대신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서로 통하여, 요시라(要時羅)가 거간(居間) 왕래하였는데, 그가 말한 바가 마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해서 우리 나라는 그걸 믿었었다. 이때에 왜적이 재침을 모의하면서 우리 나라의 수군을 꺼려했고, 그중에서도 더욱더 이순신을 꺼렸다. 


  이에 요시라를 보내서 말하기를 ‘강화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실로 가토 기요마사가 주장하고 있어서이다. 만약 그를 제거하면 나의 한이 풀리게 되고 귀국의 근심도 제거될 것이다. 모월 모일에 가토 기요마사가 어느 섬에서 묵을 것(宿)이니, 귀국에서 만약 수군을 시켜 몰래 잠복해 있다가 엄습하면 결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응서가 이로써 보고하니, 왕(上)이 황신(黃愼)을 보내어 이순신에게 비밀히 유시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배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戰艦)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끝내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가토 기요마사가 과연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 왔다가 그대로 서생포(西生浦)로 향했는데, 이는 사실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작은 군사로 우리를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을 들어 이순신을 하옥시켜 고신(栲訊)하게 하고, 마침내 전남 병사(全南兵使) 원균을 통제사로 삼았다.

정 전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원균을 천거한 인물들이 충무공을 모함하기는 했으나, 원균이 직접 충무공을 지칭하여 파직하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근거는 없다. 악명높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이동경로와 일시에 관한 거짓된 정보를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통해 선조에게 제공하고, 선조가 거기에 속아 충무공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는데, 충무공이 왕명에 불응한 것이 충무공 파직,하옥의 주된 원인이다.

요시라(要時羅)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로 조선조정으로부터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까지 받은 인물로서, 왜군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조선에 알려주고, “풍신수길이 곧 망할 것이다.” “조선왕자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서는 안된다.”등의 말로 조선조정의 환심을 산 다음, 한산도에 있는 조선수군을 부산포로 유인하는 공작을 벌였다. 1597년 정유재란 직전 왜군은 경남 남해안 곳곳에 주둔하여 사실상 부산포에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그림 2>1597년 정유재란 초기의 상황
왜군은 경남 남해안 곳곳에 진을 치고 사실상 부산포 일대에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유인책에 무능한 임금 선조가 말려들어 수군을 부산포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장수 이순신은 파직 당하고, 그 후 명령을 따른 장수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패전,전사한 것이다. 이는 당대의 문신 이식(李植, 1584∼1647)의 『택당집』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식(李植), 『택당집』, 택당선생 별집 제10권
한편 생각해 보건대, 공(公)이 죄를 얻게 된 것이나 원균이 패망한 것 모두가 왜적의 첩자(諜者)에 농락당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왜적은 먼저 부산과 동래 지방을 점거하여 대마도와 상응하는 형세를 취하면서 한번 돛을 달고는 곧장 건너오곤 하였으므로, 우리 군대가 바다를 향해 진격하더라도 그들은 싸우지 않고 피하기만 하면서 멀리 동해에 머물러 있곤 하였다. 그런데 이곳의 형세는 서해(西海)의 수로(水路)와는 제어하는 면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우리 군대가 이곳의 길목을 차단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우리 수군이 누차 승첩(勝捷)을 올리는 것만 보고서 반드시 싸우도록 요구하였던 것인데, 원균 역시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진격했다가 끝내는 패망하고 말았으니, 이 모두가 사실은 멀리 조정에서 지시를 잘못 내린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장수의 전사는 장수 한사람만의 전사로 그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원균의 칠천량해전 패전은 막강했던 조선수군의 전멸과 호남지역마저 왜적에 유린당해 생지옥화하는 참극을 초래했다. 왜군은 남녀노소 구분없이 살륙을 자행하여 전공(戰功)으로 코를 베어 바쳤는데, 그 코무덤이 지금도 교토(京都) 등 일본 몇몇 군데에 있다고 한다.

 

정유재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남부의 조선인을 모두 죽여 없애고 일본 서부인들을 이주시킨다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그만큼 더 피해가 컸다. 정유재란 초기 조선군의 패전은 결코 병력,화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왜군의 반간계와 유인전술 등 전략전술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 <그림 3> 조선사에 기록된 충무공의 졸기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원균과 화합을 이루지 못하므로 모함을 당하였다.”고 하여 사실상 원균모함에 의해 충무공이 파직된 것으로 기록하였다.

 
사실 충무공의 파직원인이 원균모함이 아니라 요시라의 계략이라는 것은 학계에서 처음 제기된 주장은 아니다. 정 전교수가 새로이 밝힌 것은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한 『조선사』(총35권)에서부터 충무공의 파직원인을 원균모함으로 조작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대와 그 후대의 거의 모든 기록에는 파직원인이 요시라의 계략인 것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에서부터 원균모함으로 조작,고착시켰다는 것이다.  

 

조선사편수회(1925년 설립)는 이완용, 박영효 등이 고문으로 선임되었으며, 이병도, 신석호 등이 수사관(修史官)으로 참여한 조선총독부 소속기관으로 회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는 식민통치를 위한 목적에서 일제가 10년 이상에 걸쳐 많은 시간과 예산을 들여 발간한 총35권으로 된 편년체 역사서인데, 식민사관 구축의 토대가 되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에는 『선조실록』에서 요시라에 대해 나쁘게 쓴 내용이 전부 누락,은폐되었다. 요시라에 대한 『선조실록』의 기록은 칠천량해전 패전 이후에는 불구대천지원수로서 고기를 씹고 그 가족을 깔고 앉고 싶은 놈(皆欲食肉而寢皮)이라는 심한 표현으로 기록될 정도였지만, 그 칠천량해전 패전 이전에는 조선에 유리한 정보제공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상을 내리고, 벼슬까지 준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에는 원균 모함에 관한 것은 수록하면서 요시라에 대해 나쁜 내용을 전부 누락,은폐시켜 교묘한 방법으로 원균모함설로 인식되게 해놓았다. 이는 <그림 3>과 같이 충무공의 졸기(卒記)에 잘 나타나있다.

일제강점기에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는 그의 교육시책에서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어 그것을 확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든다”고 말하였다.(박성수, 『조선사』와 일제식민사학의 후유증, 2013)

 

이순신의 파직원인을 요시라의 거짓에 두지 않고 원균의 모함에 둔 것은 조선총독 사이토의 교육시책에 그대로 부합하는 것이다. 조선인은 서로 모함하는 열등한 민족으로 비하하기에 적합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요시라의 거짓말을 은폐시킴으로써 일본인은 그만큼 거짓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정직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게 된다.

 

현재에도 일본우익이 독도문제나 역사에서 엄연히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간과하고 일본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최근의 풍조는 일제강점기때부터 형성된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 <그림 4>거문도 김윤삼 노인(당시87세)의 인터뷰기사, 1962년 3월 19일자 《민국일보》
1822년부터 거문도의 조상들이 울릉도, 독도에 도항하여 울릉도에서 배를 만들고, 독도에 가서 물개를 잡았다고 증언하였다.

 

정 전교수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시대상황이 임진왜란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중간첩 요시라에 온나라가 농락당하는 일이 혹시나 되풀이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정 전교수는 이외에도 조선사편수회 『조선사』에서의 구체적 역사왜곡 사례로서, ‘고려말 명나라의 철령위 위치를 요동에서 강원도로 왜곡’, ‘고종시대의 강화도조약 조문수록 누락, 사실왜곡, 일본주장 일방적 대변’ 등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또한 "독도가 반일종족주의 상징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독도는 오히려 조상전래의 어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거문도인들이 대대로 울릉도에 가서 배를 만들고 독도에 가서 물개잡이를 한 근거를 제시하여 참석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림 5>독도폭격사건을 보도한 1948619일자 조선일보

뉴욕타임즈지를 인용하여 한국어민들이 조상전래의 어장에서 폭격당하였다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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