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중국 산동성 총씨(叢氏)는 김일제의 후예

김영호 기자 / 기사승인 : 2021-01-14 2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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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곤양지전에 대한 서적이 많다. 이 그림은 흑룡강미술출판사에서 출간한 곤양지전 표지이다.


◇산동성 위해시에 사는 김일제의 후손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성씨와 가문의 계보에 대해 연구하는 보학(譜學)을 전근대적인 학문으로 격하시켰다. 그 결과 보학은 역사연구 대상에서 완전히 쫓겨나 소수 문중학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임금부터 시골유생에 이르기까지 보학을 모르면 이른바 양반행세를 할 수 없었던 조선에 비교하면 보학이야말로 일제 때 가장 강력하게 탄압받은 학문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중화사상이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는 중국은 보학연구가 대단히 활발하다. 중국의 성씨 중에 총씨(叢氏)가 있는데, 이들을 연구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은 씨(氏)보다 성(姓)이란 표현을 더 많이 쓰는데, 총성(叢姓)의 시조를 흉노왕족 김일제(金日磾)로 모시기 때문이다. 총성은 중국 북방에 주로 거주하는데 그 숫자는 약 41만여 명으로 중국에서 233번째로 많은 성씨다. 중국의 성씨 연구자들에 따르면 총성의 연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데 가장 빠른 것은 이기씨(伊耆氏)의 후예라는 것이다.

《국명기(國名紀)》나 《성씨고략(姓氏考略)》, 《장자(莊子)》 같은 문헌사료에 의하면 요임금 시대에 숭(崇), 지(枝), 서(胥), 오(敖)라는 4개의 고대국가가 있었는데, 현재 호북성(湖北姓) 의성(宜城)시에 있었던 지국(枝國)의 왕족이 총씨의 선조라는 것이다. 지국의 임금이 총지(叢枝)였는데, 그가 요임금의 신하가 되어 제후로 책봉받았는데, 그 후예들이 총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 김일제의 후예가 총씨라는 것이다. 중국의 보학 연구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거기장군 김일제의 후예들은 한나라에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왕망이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후 탄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일제의 후손들이 지금의 산동성 위해(威海)시 문등(文登)구에 있던 ‘총가현(叢家峴)’으로 이주해 ‘총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총씨들이 아직도 김일제를 시조로 받든다는 점에서 총씨들이 김일제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김일제의 후손들이 왕망에게 핍박을 받아 망명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한서(漢書)》 〈김일제 열전〉은 “김당의 어머니 남은, 곧 왕망의 어머니 공현군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다[當母南 卽莽母功顯君同產弟也]”라고 말하고 있다. 김일제의 증손인 김당의 어머니와 왕망의 모친은 어머니가 같은 동모(同母)자매로서 아주 가까운 인척관계이니 왕망 즉위 후 더 많은 권력을 차지했을 것이지 탄압 받았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가야사》를 쓴 역사학자 문정창은 신(新)제국을 세운 왕망은 성이 김씨이고 투후 김일제의 증손이라고 말했는데, 왕망이 김씨인지는 더 연구해보아야 할 문제지만 《한서》의 내용만 가지고도 김일제의 후손과 왕망은 아주 가까운 인척관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신(新)나라는 서기 9년에 건국되어 서기 23년에 멸망한 단명왕조다. 따라서 신나라에 탄압받았으면 뒤이어 들어선 후한 때 더욱 중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씨란 성씨를 숨기고 총씨로 살았다는 것은 후한 유씨들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위해시 문등구는 황해와 접하고 있는 곳으로서 한반도로 오는 도중에 작은 섬들이 많이 있어서 예부터 한반도로 건너오는 뱃길이었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왕망이 무너지고 후한이 들어선 후 탄압을 피해 산동성 위해시로 망명했다가 일부는 김성(金姓)을 총성(叢姓)으로 바꾸고 숨어 살았고,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가서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후한 광무제 유수의 초상

◇개혁군주 왕망의 몰락

왕망에 대해서는 그간 극도의 폄훼가 이루어졌다. 《한서》 〈원후(元后) 열전〉은 왕망의 사자인 사촌형제 왕순(王舜)이 전국새(全國璽)를 갖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王政君)에게 옥새를 달라고 하자 왕정군이 옥새를 땅에 내던지며 “나는 늙었으니 이제 죽지만 너희 형제를 보니 이제 집안이 멸족되겠구나!”라고 꾸짖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왕망의 고모였던 왕정군이 조카의 즉위를 극도로 저주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유방의 부인이었던 여후(呂后)가 황제가 된 적도 있는 판국에 왕망이라고 황제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왕망은 즉위 후 유학자 유흠(劉歆)을 중용해 유학의 이상주의를 실천하는 정치를 시행했다. 그는 유학자들이 이상사회로 삼는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이상을 현실에 실현시키려고 했다. 그는 대일통사상(大一統思想)에 근거해 제후왕들의 ‘왕(王)’호를 ‘공(公)’으로 낮추고, 주변 국가들의 왕(王)호는 제후를 뜻하는 ‘후(侯)’로 낮추었다. 또한 삼대의 이상사회는 백성들이 농토를 고르게 소유해 경제적으로 평등했던 사회였다. 그래서 왕망은 모든 토지를 국유로 만드는 왕전제(王田制)를 실시해 백성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또한 재정부문에서 상인들의 폭리를 막기 위해 후세의 소금, 철, 술 등을 정부에서 전매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과거에는 ‘한(漢)정통론’, 또는 ‘유씨(劉氏)정통론’에 의거해 왕망의 이런 정치행위를 극도로 비난했지만 최근에는 중국에서 왕망의 정책을 국가 사회주의 정책과 유사하다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왕족인 유씨는 물론 각지의 귀족, 대부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린 왕망의 급진개혁정책은 유씨들과 귀족, 대부호들의 격렬한 반발을 받았다. 유씨들은 유현(劉玄)을 천자로 추대해 왕망에게 저항했으나 장안을 공격하던 유현은 적미군(赤眉軍)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유현을 추대했던 유수(劉秀:후한 광무제)가 그 뒤를 이어 신나라를 공격했다. 이 무렵 한재(旱災)와 황충(蝗蟲) 등이 극성을 부려 흉년이 들자 굶주린 백성들이 봉기군을 조직했다.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경산(京山)시 녹림에서 모여 녹림군(綠林軍)이라고 불렸던 이들이 후한을 세우는 유수의 주력군이었다. 서기 23년 왕망은 왕읍(王邑), 왕심(王尋) 등에게 42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백만군사라고 호칭하고 지금의 하남성 섭현(葉縣) 일대인 곤양(昆陽)에서 유수의 녹림군을 정벌하게 했는데, 이를 ‘곤양대전[昆陽之戰]’이라고 한다. 곤양대전에서 왕읍의 군대가 대패하고 녹림군이 장안으로 진공하자 두려워진 왕망의 시종 공손취(公孫就)가 서기 23년 9월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침으로써 신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왕망전, 왕망전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큐슈에서도 발견된다.

◇정치보복과 망명

유씨가 다시 나라를 되찾았으니 왕망과 그 지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보복이 자행되었을 것임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지지세력 중에 김일제의 후손들이 포함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산동성 총씨(叢氏)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서해(황해) 바닷가 마을까지 도주했다. 일부는 김성을 총성으로 바꾸어 산동성 위해 지역에서 그대로 숨어 살았고, 일부는 뱃길로 서해를 건너 한반도로 건너왔을 것이다.

그 증거의 하나가 왕망 때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과 화천(貨泉)이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왕망 때 사용하던 여러 화폐들은 왕망전(王莽錢)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은 물론 대동강 유역의 평양 등 한반도의 서북부에서 오수전과 화천이 발견되다. 또한 옛 가야지역인 김해는 물론 창원의 다호리 유적에서도 왕망전이 발견된다. 또한 일본의 큐슈 일대에서도 발견된다. 이 왕망전은 왕망의 신왕조를 지지했던 세력들이 정치보복을 피해 이주한 흔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출토된 유물 하나에도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이다.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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