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東-20] 나주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의 피장자 실체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9-08 1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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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나주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의 7가지 묘제

[자료] 나주 복암리 고분전시관 전시자료 

 

 

1996~98년의 나주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 발굴은 영산강 유역의 고대 사회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은 동 고분이 최초로 발굴될 때 처녀분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400여년 간 동일세력으로 추정되는 집단이 지속적으로 고분을 축조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3세기부터 7세기까지 40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왕국, 영산강 세력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고분 피장자들을 문헌 속에서 찾기 위해 그 특성을 살펴본 결과 영산강 유역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복세력, 누대(400)에 걸쳐 최고위급 관리를 배출한 세력, 철기 등 선진적 무기를 보유한 무장세력, 가야 및 왜와 친연성을 갖춘 세력 등의 특징이 나타났다. 이를 만족하는 세력을 찾기 위해 백제권의 대성팔족 등 꾸준히 세력을 유지한 정치집단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중국 남제서동이열전 백제조의 동성왕 관련 기사에 사법명을 가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가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례곤을 가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성문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라고 하여 호남지역 왕·후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조사한 결과 무진(광주)으로 비정되는 면중후(面中候) 목간나만이 영산강 세력으로 분석되었다.

 

목씨는 삼국사기475년 개로왕이 죽자 목협만치가 문주왕을 호위하여 남쪽으로 떠났다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서에 나타난 목씨들을 살펴보면 3세기 초의 가라 7국 정벌전쟁 또는 포상팔국전쟁을 필두로 임나국 재건(목라근자), 400년 광개토왕의 임나 공격 방어(목토숙녜), 신라와 대결 후 120현민의 열도 이주(목토숙녜), 한성백제 멸망시 문주왕 호위 및 웅진백제 재건(목협만치), 2차례에 걸친 북위 전쟁 승리(목간나) 3세기~5세기말까지 대규모 전쟁에 모두 목씨가 출현한다.

 

특히 5세기말의 목협만치는 열도로 이주하여 소아(蘇我)로 성씨를 바꾸었는데, 소아만지((蘇賀滿智)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 소아씨의 계보는 소아석하(蘇賀石河)-소아만지(蘇我滿智)-소아한자(蘇我韓子)-소아고려(蘇我高麗)-소아도목(蘇我稻目)소아마자(蘇我馬子)-소아하이(蘇我蝦夷)-소아입록(蘇我入鹿)으로 이어진다. 소아씨는 6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 왜왕권의 최대 정치세력이었다. 소아마자는 추고천황 34년까지 열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존재로 군림하면서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일으켰다. 소아마자는 왜 왕실에서 전대미문의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수서동이전에는 개황 20(600)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왔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6세기말~7세기초에 걸쳐 절대권력을 가진 남성 왜왕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소아씨의 원래 성이 임()씨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임씨가 백제국 목귀공의 후손(百濟國人木貴公之後也)이라고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목()씨들이 임()씨로 성을 바꾼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국, 즉 한반도에서 살아온 임씨들의 현 상황을 살펴본 결과 임()씨는 크게 나주 임씨와 평택 임씨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중 나주 임씨는 나주 다시면 회진리에 여전히 집성촌과 대종가를 유지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 대조를 통해 나주 임씨가 목씨의 후손들이며, 나주 아파트형 고분 피장자는 목씨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중국의 백도백과와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목씨의 시조는 춘추시대 공자의 수제자인 단목사(端木赐)로 확인되고 있다. 상우록에는 목씨가 단목사의 후손으로 나온다. 단목사(端木赐)는 기원전 520~456년 시기의 사람으로 자는 자공(子贡)이다. 춘추시대 말기에 위()나라 려(, 현재의 하남성 학벽시 준현(鹤壁市浚县))에서 태어났다. 사기에 따르면, 자공은 뛰어난 언변과 지혜로운 계략으로 상대방의 침략 의도를 꺾는 최상의 병법인 상병벌모(上兵伐谋)의 전범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단목사는 집안에 천 금을 쌓아둘 정도로 뛰어난 재기를 갖고 있었다. 부민부국을 부르짖었던 춘추전국시대 상가(商家) 사상의 핵심인물(관중, 자공, 사마천, 범려) 중 그 효시인 관중과 비교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중국 민간에서 단목사는 재신(財神)으로 숭앙받고 있다. 많은 가게에 단목생애(端木生涯)’라는 족자가 내걸려 있을 정도이다. 이후 단목씨는 유교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유교를 처단 대상으로 삼음에 따라 단목사의 9대손인 단목조가 진화(秦祸)를 피하기 위해 성씨에서 단을 제거하여 목씨로 개칭한 이후 중국 동해안을 거쳐 한반도의 영산강 유역으로 집단 이주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끝>

그간 시리즈 기사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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