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인] “K-방역의 성과는 민주주의의 힘 깨어 있는 시민들이 위기 막아내”

김영호 기자 / 기사승인 : 2020-10-12 13: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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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 송기인 신부가 10월 5일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사제관에서 <공감>과 인터뷰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 송기인 신부
부마민주항쟁이 10월 16일 국가기념일 지정 1주년을 맞는다. 부마민주항쟁은 우리나라 4대 민주항쟁 중 가장 늦게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아직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2018년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아 국가기념일 지정에 앞장섰고,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써온 송기인 신부를 10월 5일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사제관에서 만났다.
송 신부는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시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교육·문화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했다”며 “지난 1년 동안 항쟁의 가치를 기억하고 정신 계승을 위해 힘써준 많은 관계자와 시민들께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송 신부는 특히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코로나19로 세계적 위기에 봉착한 이때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며 “우리나라 K-방역이 이처럼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힘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있기에 우리는 위기 속에서 일치단결해 코로나19를 막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머무르는 ‘죽은’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깨어 있는 민주시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민주화운동 기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 1년이 됐습니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에 비해 지난 40년 동안 역사적 의미가 과소평가되고 저평가됐습니다. 2019년 고 유치준 씨가 부마항쟁 관련 첫 사망자로 공식 인정된 데 이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늦게나마 재조명됐지만 전국적 인지도가 낮은 편입니다. 앞으로 공교육 영역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제대로 교육되고 헌법 전문에도 부마항쟁이 실리는 등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와 위상을 제대로 교육하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상규명과 관련자 배상 등은 어느 정도 진척이 이뤄졌습니까?
=우리 재단은 2019년 상반기에 자문변호인단을 꾸렸고 그해 6월에 부산 5명, 마산 16명 등 부마항쟁 관련자 21명이 소송을 제기해 현재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그중에서 고호석 부마재단 전 상임이사 사건은 1심에서 패소했고 항소해 사건이 진행 중입니다. 현재 재판부에서 상속인들에게 2000만 원 정도 손해배상하는 것으로 화해권고 결정이 났지만 국가가 화해권고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해서 10월 7일 판결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국민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하고 있나요?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리멤버 부마’라는 부마 관련 영화 상영과 토크쇼 등이 있습니다. 또 문화제·영화제도 10월에 진행될 예정입니다만, 코로나19로 인해 영화제 등이 온라인으로 운영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서 부마민주항쟁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높지만 이를 소개하고 알리는 자료가 많이 부족합니다.
2019년에 이어 2020년에도 ‘1979년 그날의 사진첩을 열다’라는 주제로 부마 사진전을 개최합니다. 코로나19 탓에 온라인 사진전으로 여는데 항쟁 관련 사진과 영상을 전시하게 됩니다.
또 ‘부마로드 방방탐방’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이 직접 또는 온라인으로 부마길을 답사·탐방해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배우는 초등생 부마민주캠프’ ‘부마민주항쟁 교육자료 제작’ ‘1979 부마로드 워크북 제작’ ‘사회포럼’ 등 다양한 교육·문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술 사업으로는 5월에 부마항쟁 연구서를 출판했고, 10월 말에는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며 부마항쟁 관련 연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 16일 경남 창원시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 송기인 신부가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가기념일 지정 1주년 행사도 있나요?
=제41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이 있습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부산에서는 처음 열리는 기념식입니다. 부마항쟁이 처음 시작된 부산대학교의 넉넉한 터에서 열리는 이번 기념식의 주제는 ‘다시, 시월에 서서’입니다. 2020년은 코로나19로 인해 규모가 다소 축소됐지만 부마항쟁을 알리고,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행사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주항쟁 관련 재단들과 연대는 어떻게 하십니까?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회에는 5·18기념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 다른 민주화운동 기념단체의 대표도 이사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또 2019년에는 5·18기념재단과 공동으로 진상규명을 주제로 국회 토론회도 개최했습니다. 관련 법률 개정, 진상규명 등 집중해야 할 현안에 함께 대처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민주평화인권 네트워크를 통해 관련 단체들과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5·18기념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3평화재단,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노근리국제평화재단 등이 소속돼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상시적으로 연대할 수 있게 매년 공동 워크숍도 열고 있습니다.

-부마항쟁기념재단의 앞으로 과제는 무엇일까요?
=부마항쟁을 어떻게 공교육뿐 아니라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교육할 것인지가 고민입니다. 정부는 교과서에 부마민주항쟁이 그 역사적 의의에 맞게 제대로 기술되도록 해야 하고요. 2019년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다 보니 교과서에 반영되는 것은 이제 작업 중인 듯합니다. 우리 재단도 부마민주항쟁 교육을 일선 학교에서 진행할 수 있도록 초등용과 중고등용 10월 계기교육 교재를 현재 배포하고 있습니다. 부마민주항쟁 탐방 코스를 개발해 학생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육사업이 앞으로 더 활발하고 다양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데 기본은 ‘기념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부마민주항쟁을 상시적으로 알릴 수 있는 전시 공간·추모 공간·교육 공간 등이 필요합니다. 부마재단은 신생 재단이라서 다른 민주화운동기념재단에 비해 기념시설 부분이 아직 미흡합니다.
오늘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든 원동력의 한 축은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대통령께서 처음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매우 뜻깊은 일이라 생각하고 정례화되길 희망합니다. 앞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법’이 마련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해 국가가 제대로 된 예우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K-민주주의는 이들의 헌신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 등 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코로나19로 세계적 위기에 봉착한 이때 진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K-방역이 이처럼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결국 제도의 힘입니다. 기술과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감염병에 대응하니 큰 성과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K-방역의 최대 주역은 시민들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있기에 우리는 위기 속에서 일치단결해 코로나19를 막아내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제도와 깨어 있는 시민, 이 두 가지를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통해 역사적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위협하는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 많은 시민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유신독재 무너뜨린 계기 된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으로 역사적 의미 재평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5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서 거리 시위에 돌입했다. 5000여 명으로 불어난 학생들은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비슷한 시간대에 부산 동아대학교를 나선 학생 1000여 명과 합류했다. 이날 거리 시위를 하는 학생과 경찰이 곳곳에서 충돌하며 수백 명의 학생이 연행됐고 100여 명의 경찰과 학생이 다쳤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됐으며, 회사원·노동자·상인·고교생 등 각계각층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본격적인 민주항쟁의 양상을 보였다.
 

박정희정부는 사태가 확대되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10월 20일 정오에는 경상남도 마산·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는 등 박정희정부의 강도 높은 대응으로 부마민주항쟁은 표면적으로 진압됐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 직후 일주일도 안 돼 10·26사건이 일어나며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모순들이 폭발한 사건이었고, 사실상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부마민주항쟁은 그동안 한국 현대사의 4대 민주화운동(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가운데 저평가됐으나 2019년 7월 17일 국무회의에서 부마항쟁이 국가기념일(10월 16일)로 의결되며 그 역사적 의미를 재평가받고 있다.   (출처=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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