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예술가는 왜 가난할가요?
사람들은 우아하고 고상하며 품격있는 지성의 영역으로써 예술을 선호하고 동감하려고 하죠.
계급사회안에서 자아의 상실과 결핍의 공백을 메울 대체물이 필요했을지도 몰라요
인문학적 지성의 소유자 라는 특별한 계급의식은 이해할수 없는 미술작품 앞에서 더 빛나게 되고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와 교육적 환경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더 부유하고 풍족한 계급의 그림자를 따라해 봅니다.
예술은 그 어떤 조건이라도 소유의 대상에 있어서 남보다 유식하고 남보다 여유로운 경제상황에 있으며 그 누구도 즐길줄 모르거나 즐길수 없는 특권의 자부심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부와 교양의 상징인 예술작품을 만든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하죠.
가난과 전혀 매치되지 않는 현대 귀족들의 사유물이 가난속에서 잉태되여 성장했다면 우리는 어떤생각을 할가요?
만약에 미래에 미술계의 거장으로 성장할 사람이라 하더라도 현재 가난과 씨름하는 화가의 작품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보며 현재 세계적으로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은 또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가요?
그리고 그 작품들의 주인공은 부유하게 살았을가요 대부분 가난속에 허덕이며 살았을가요?
오늘날 현대에 까지 “현귀족”들의 전유물로 유일한 상징이 되는 고가의 미술품이 가난과 어떤식으로 연결될수 있을가요?
이 문제는 미술발전의 역사속을 살피면 알수있습니다.
유교적 선비사상에 심취한 동양화와 달리 현대는 서구식 경제질서와 그로인해 파생된 문화들이 우리의 삶속에 주류를 이르고 있으며 기축통화로 전세계적 경제와 문화 심지어 국가와 민족까지도 연결되여 있죠.
요즘은 국제결혼이 신기한 현상이 아니며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나라에 이민으로 가는것이 가능한 시대죠.
이렇듯 세계화된 경제라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보면 서구의 경제발전사와 함께 철학과 예술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있죠.
-화가는 배신자이다.
새로움은 익숙한것의 비판에서 탄생하죠.
누구의 시선인가에 따라 배신으로도 되고 혁명으로도 됩니다.
신을 승배하던 시기에나 귀족들을 승배하던 시절 예술가는 자신들의 재능으로 그들의 주문품을 만들면서 그 댓가로 한동안 살아왔죠.
하지만 화가들은 주문받은 일의 댓가로 살아가는것에 만족을 못하고 스스로의 표현을 고집하게 됩니다.
다른 시각으로 말 한다면 자신의 삶에 필요한 물질을 제공해주던 신과 귀족들을 배신하고 그들의 요구를 부정하면서 부터 미술은 발전의 성급한 발자국을 떼기 시작합니다.
사회역사의 발전이란 사회공동체의 기존이 무너지고 새로운 기존이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과정이죠.
자신만의 관찰, 자신만의 표현에 대한 개성의 욕구는 당시의 시대적 가치에 반기를 들게 하였고 물질 공급자들을 부정하다가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은 사회발전의 계단들 마다 새로움을 행한 탐구의 가치로 기존을 부정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남보다 먼저 라는 속도에 집중되기도 하죠.
요즘 일반적인 시각에서 알아보는 작품은 철학과 문화발전에서 후진것으로 관념이 일반화되였고 알수없는 새로운 형상에 열광하는것이 세계적 인식의 흐름이죠.
현실에 융합되지 않는 앞선 사고의식의 결과물이 과연 현실에서 어떤 가치를 논할수 있을가요?
요즘도 인사동에 걸린 수많은 작품들중에 어떤 장르의 작업물들이 대다수 감상자의 공감을 확보 할가요?
화가들은 이세상에서 가장 이기적 존재이다.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시간 생각할수 있는 직업은 무었일가요?
예술가의 개성과 전혀 보편적이지 않는 특징의 대명사로 알려진것은 현실과 미래, 생각과 성장의 관계에서 보다 쉽게 파악할수 있죠.
예술가는 보편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죠. 그리고 인간에 대해 더 넓은 이해를 도모하죠.
모든 이기적 욕망과 생존방식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언어에 대해 누구보다 잘알고 있으며 존재의 양립적 모순을 현실과 자아의 싸움속에서 체험하며 자연스럽게 내적되죠.
그러면 결핍의 의존에 대해 보편적 의증과 다른 방식을 선호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면서 가증되는 사회적 존재성 여부에 치우치는건 당연한거 아닐가요?
현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작품을 작업한 화가는 과연 부와 가난중 어느것에 더 가깝다고 할수 있을가요?
작가가 성공이 제공하는 물질적 부를 탐하는 목적으로 작업을 한다면 현실의 욕망이 주는 프레임 안에서 항상 타의존적 시선을 인식하면서 그에 맞추려는 작업을 할거예요.
다수의 시선을 인식하고 눈치를 봐가는 작업은 현실의 가치관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타자의 욕망에 아첨하는 미술작품을 만들수 밖에 없죠.
흔히 보는 아름다움, 위로, 평안 과 같은 의미의 작품이 대중화 되는것은 대중의 시선에 맞춘 상품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죠.
새로운 관념이나 발상은 낯설고 불편해서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죠.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외면하고 스스로의 독립을 선호하는 자기실현의 추구를 하는 화가는 늘 가난하죠.
어쩌면 현실보다 먼저 라는 새로움과의 모순안에서 작업하기에 가난은 화가들의 운명이 아닐가요?
그 운명속에 오랜시간 몸부림치는 울음의 흔적들 앞에서 우리는 명화가 가져다 준 환상만 환호하고 있는것은 아닐가요?
가치관의 차이는 너무나 기적같은 형상을 현실속에서 증명되게 하는 어마어마한 특권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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