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한국통사] "기자(箕子)는 평양에 온 적이 없다"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4-20 11: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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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 사람 기자가 고려와 조선의 중화사대주의로 인해
단군을 이은 정통으로 보고 평양에 묘를 만들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은나라 사람 기자가 고려와 조선의 중화사대주의로 인해 단군을 이은 정통으로 보고 평양에 묘를 만들다

 

기자(箕子)는 중국(中國) ()나라 주왕(紂王)의 친척(親戚-조카)으로서 나라가 망()하여 조선(朝鮮)에 들어와, 예의ㆍ전잠(田蠶)ㆍ방직(紡織)과 팔조(八條)의 교()를 가르쳤다 하나, 이는 후세(後世) 사람들의 조작(造作)인 것으로 보는 것이며, ()의 두예의 주()에는 기자(箕子)의 묘가 양()나라 몽현(蒙縣)에 있다 했다. 기자(箕子) 동래설(東來說)은 사실(事實)이 아니라는 것이 지배적(支配的)이다.

 

▲  평양 기자묘 (1922년 촬영)
 

箕子墓 기자묘=평양(平壤) 을밀대(乙密臺) 아래에 있는, 이른바 기자(箕子)의 무덤이다. 고려(高麗) 15대 숙종(肅宗) 7(1102)년 분형(墳形)을 찾아 제사(祭祀) 지냈다고 하나, 이 무덤이 과연 기자(箕子) 동래설(東來說)에서의 그의 것이라는 데 대()하여는 근거(根據)가 없는 것이다.

 

▲  기자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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