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朴東)-05] 상나라의 멸망 이후 삼조선의 정립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5-08 02:24:39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상나라 멸망 이후 삼조선의 정립- 구글지도 위에 필자가 그림

 

()나라가 멸망한 이후 그 유민인 색()씨와 서(), 조씨, 소씨, 장작씨, 미작씨 등 은민육족(殷民六族)들과 엄()국인들은 주나라에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패하여 동북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에 대해 부사년은 상나라가 멸망한 이후 그 후예들이 다시 동북으로 복귀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백이와 숙제는 사기백이열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상을 멸망시킨 주나라에 대해 폭력을 또 다른 폭력으로 바꾸었을 뿐이라며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 그리고 사기송미자세가에 따르면, 주무왕은 홍범구주를 바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그를 신하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상나라의 패망에 따른 후폭풍이 거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자조선은 상나라 유민들이 주축이 된 나라로서 나중에 진조선, ()조선, 막조선 등 삼조선 중 발()조선에 속한 나라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

 

위의 [그림]은 주()의 공격으로 상나라가 멸망한 이후 그 유민들이 동북으로 이주하면서 발()조선이 정립되는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원화성찬에 따르면, 색국(索國)은 원래 은나라를 지탱하던 핵심 7대 공족 중 하나로서 하남성 정주 형양(荥阳)시 경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주나라에 패하면서 주력이 노()나라로 강제 사민당할 위기에 처하자 동북으로 대규모 이주를 감행했다. 그리고 서씨들 중 일부도 동북으로 강제 이주당했고, 엄국도 강제 사민당했다.

 

이 과정에서 색씨와 서씨는 북부로 이동하여 부여국을 확대·강화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이때 산동성에 있던 부유(鳧臾) 세력들도 동북으로 이동하여 부여에 합류하였다. 부유는 부여를 가리키는 것으로 태호 복희묘가 있는 산동성 부산(鳧山) 인근 지역에 선주하던 동이족들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이주와 사민이 이루어진 결과 발해만 연안에 발조선이 성립하면서 삼조선이 정립하게 된 것이다.

 

제곡 임금 시기의 산융, 발식신 등이 상나라를 건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박이라는 수많은 지표지명을 남겼고, 다시 춘추 초기에 발조선과 번조선 등으로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상나라가 멸망당한 이후 동이족들은 여러 나라로 분화하였는데, 그 중심국이 부여였다. 부여의 부는 번족(番族)이고 여()는 서족(徐族)을 가리킨다. 상서무성 공씨전에는 바다 동쪽의 여러 동이족들은 구려, 부여 간맥에 속했다.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모두 그 길로 통했다.”라고 했다.

 

이는 주 무왕 때 이미 부여족이 동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나라 초기에 번()과 서() 두 씨족이 부여족의 새로운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이것이 바로 훗날 역사책에 나오는 부여족이다. 삼국지위서 부여전에는 그 나라의 노인들은 자기네들이 옛날에 망한 나라의 사람이라고 말하였다.”라고 하는데, 위의 상서무성 공씨전의 기록과 연결시켜 해석하면 부여인들은 상나라의 후손 또는 상나라를 뒷받침하던 동이족들이 주축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이 멸망한 이후 주공단은 그 유민들을 주왕실과 거리가 가깝지 않고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산동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그런데 은민육족 중 서씨와 색씨는 주공의 식민화 정책에 반발하여 끝까지 대항하게 된다. 그리고 후한서등에는 부여 동명왕 세력이 북쪽의 색리국(索離國)에서 도망쳐 남쪽에 부여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부여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혼란만 가중하고 있다. 색씨는 중원 하남성 형양의 색국인들이고, 동명왕이 색국을 떠났다고 해서 색리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춘추좌전소공 9년에는 무왕 때에 이르러 상나라에 승리하여 포고(蒲姑)와 상엄(商奄) 땅을 우리 주나라의 동쪽 땅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포고는 박고(亳姑)로서 산동성 박흥현을 가리킨다. 사기관채세가에 따르면, 주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숙부인 주공단이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관숙과 채숙은 주공을 의심하여 무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소위 삼감의 난 또는 관채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동이족의 주축을 이루던 회이(淮夷)와 서융(徐戎)도 가담했다. 이에 주공이 사()에 임명되어 동쪽으로 회이를 정벌하고 엄()을 멸한 후 그 군주를 박고(蒲姑)로 옮겨 살게 했다.” 이와 관련 청동기 학방정(壆方鼎)에는 주공이 동이와 풍백과 박고를 정벌하여 모두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동이족 정벌에 대해 당가홍은 박고가 멸망하자 일부 남은 민족은 동북으로 이동해 자신을 부여(扶餘)’라고 일컬으며 예인(濊人)을 통치하였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박고, 포고(蒲姑), 부고(簿古), 반고(盤古), 반호(盤瓠) 등은 모두 부여와 같은 말로 통한다. 회이 중 가장 강성했던 서이(徐夷)의 일부와 더불어 산동의 박고 등이 동북으로 이주하여 부여족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시리즈 6편에 계속됩니다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저작권자ⓒ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주요기사

+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