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東-15] 산동 래이족과 제나라의 대립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8-20 02: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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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춘추 초기 래국과 제나라의 강역
[자료] 백도백과


  래이(萊夷)족은 중국 산동성에 선재하던 동이족들이다. 래이족은 춘추 초기에 제나라에 의해 산동반도 동쪽으로 밀려났지만 상고 시기에는 하남성 동부, 강소성과 안휘성 북부 등 산동반도 인근의 모든 지역을 망라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관자』에서 관중은 “제나라가 본래 래이족의 나라이다.”라고 말했다. 래이족은 동이족들이 한반도로 이동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나 한민족(韓民族)과 동이족을 연결하는 핵심 씨족이었다. 아울러 『양직공도』에는 “백제가 옛날의 래이 마한에 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백제와 마한과도 매우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산동지역은 신석기 이후 중원과 독립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500년~3,900년 사이에 존재했던 후리→북신→대문구→용산→악석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상나라 시기에는 상의 제후국으로서 강력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상나라 시대에 래국의 치소는 창락, 임구현 부근에 있었다. 동부는 황현의 연해 지역에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래인의 명칭은 원래 이들이 소맥(밀)을 키운데서 연유한다. 래인은 최초로 보리나 밀 등 맥을 발명한 사람들이었다. 갑골문 래()자는 맥(麥)의 상형초문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래(來)와 래(萊)는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시경』 주공(周公)의 사문에는 “우리에게 보리를 주셨다(貽我來牟)”라는 노래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來와 萊가 혼용되고 있다. 래는 보리나 밀을 나타낸다. 래이의 건국 후 도성은 맥구(麦丘)였다. 이들은 밀(소맥)을 재배했는데, 이것이 옛나라 이름이 된 것이다.

 

  이러한 래국의 강역이 급격히 축소된 것은 상나라 멸망 이후 강태공이 제나라에 봉해지면서부터이다. 강태공이 제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래이족들은 제의 도읍인 영구(营丘)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강태공은 동해가에 살던 사람으로 이미 제나라에 그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봉지로 가던 도중 주민들의 도움으로 지체하지 않고 영구에 도착하여 래이족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다.

 

  춘추시대에 래국의 경제와 문화는 상당하게 발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해안가에 위치하여 물고기와 소금이 풍부하고, 제나라를 비롯한 여러 제후국의 경제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광업용 제철 산업도 발달했다. 문화 방면에서도 래이족의 음악은 래악(萊樂)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하였다. 강태공에게 패한 이후 래이족은 황현으로 천도하여 동래(东莱)라고 불렀다. 제 환공 시기에도 래와 제나라 사이의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리고 전국시대인 기원전 567년 동래는 제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래이족과 제나라의 대립은 래이족의 연패와 강역 축소로 나타나고 있는데, 실상은 래국과 제가 평화로운 합병 방식으로 공존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춘추좌전』의 기사에 따르면 래이족이 완전히 정복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나라와 제휴하는 방식으로 존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춘추좌전』 정공 10년(BC 500년)에는 노 정공이 제 경공과 래무현에서 만났는데, 이때 제나라가 래인(萊人)들을 시켜 노 정공을 시해하려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뿐만 아니라 애공 5년(BC 490년)에는 제 경공 시기에 래이족이 제나라와 3군의 대사를 도모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춘추좌전』의 두 기사를 통해 우리는 제나라에 멸망당한 이후에도 래이족들이 제의 주요 지점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여러 방면에서 협력하고 있었으며, 군사적 대사까지 함께 논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래국은 동이 구이족의 대표적 나라 중 하나로서 다수의 구이족이 연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시의소(诗义疏)』에서 이르기를 “래는 려”라 했다. 그리고 백도백과에 래국과 관련해 소개된 『산해경』에서도 려와 래를 같은 종족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울러 우이와 소호국도 래이에 포함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래이족의 대표 족성은 모(牟)이다. 래국은 본시 모족 역사상 최초로 문자상으로 기록된 모씨 나라이다. 『성씨고략』, 『원화성찬』, 그리고 『풍속통의』 등에 따르면 “모자국(牟子国)은 축융의 후손으로서 이후 그것 때문에 성씨를 삼았다.”고 한다. 모자국이 멸망당할 떄 수도는 모평(牟平)이 되었다. 나라가 망한 후 그 후손이 나라 이름을 따라 모씨라 불렀다. 모씨는 나중에 한반도로 이주하였는데, 함평 모씨가 유일한 모씨 후손이다. 모평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이기도 한데, 현재의 함평을 가리킨다. 그리고 백제 동성왕의 이름이 모대(牟大)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모씨인 것으로 파악된다.

-시리즈 16편에 계속됩니다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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