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문화 답사기] “이렇게 긴 여운을 주는 답사는 처음”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19-11-04 01: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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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포럼 운영위원)
유적지를 밟으며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함께 밀려와

  

가야의 유적지를 밟으며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함께 밀려왔다.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고분군과 발굴된 유물에서 가야의 찬란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가야로만 알고 있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많이 몰랐던 가야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고, 이렇게 긴 여운을 주는 답사는 처음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몇 년 전부터 가야답사를 준비했지만,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면서 취소되어 아쉬웠는데 103일부터 23일 동안 29명이 참여하는 답사 일정이 정해졌다. 그런데 남부지방에 강한 비를 동반한 태풍 미탁이 올라온다고 했다. 이번에도 어렵겠구나, 생각했지만 강행한다는 연락이 왔다. 비옷, 우산 여벌의 옷과 신발을 준비하고 빗속을 걸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답사길에 올랐다.

 

제일 먼저 경상북도 고령군 봉평리 청동기 암각화를 찾았다. 길도 제대로 없는 산비탈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폭우로 인해 질퍽해진 땅은 미끄럽고 밟으면 물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암각화를 못 찾고 다시 돌아와 산의 위쪽을 살피다가 작은 안내 표지와 함께 바위를 발견했다. 우리가 발굴탐사팀이 된 것 같았다.

 

수직의 자연 바위 위에 새겨진 암각화에는 톱니모양 기하문, 원형, 마제석검으로 짐승을 찌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선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었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삶의 단면을 돌에 새겼던 2000여 년 전의 사람들과 그 자취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은 뭔가 통하는 한 선으로 이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과 신발은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태풍이 지나간 가을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2019년 10월 3일부터 2박3일 간 가야문화 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답사에는 29명이 참가해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무덤으로 주로 대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위쪽에 많이 있으며 중형무덤은 산등성이 중간에 모여 있고, 작은 무덤들은 대형무덤과 중형무덤 주위나 그 밑에 분포하고 있다. 이렇게 산등성이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의 고분군이 있는 것이 특이했다. 경주 대능원도 평지에 있고, 가까운 우리 조상들의 무덤도 산 중턱이나 그 아래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가야는 산등성이에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송현동고분, 말이산고분, 대성동고분 등도 같았다.

 

지산동 고분군에는 200기가 넘는 크고 작은 무덤들이 있는데 겉모습이 확실하고 봉분이 비교적 큰 무덤에 한하여 번호를 매겨 지금은 72호 무덤까지 정해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일제시대에 도굴 훼손되었다가 성토된 것이다. 지산동 고분뿐만 아니라 말이산 고분, 대성동 고분 등도 일제 강점기에 발굴이란 이름으로 도굴되었다. 변변한 발굴보고서도 남기지 않은 채 파헤쳐지고 유물이 약탈되었다. 일제는 고고학적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유물을 찾으려고 발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김병기 박사님이 해설을 해주셨다.

 

산등성이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의 고분군이 있는 것이 특이

 

지산동 44호분에서는 대규모 순장이 발견되었다. 고분의 지름이 27m, 높이 6m의 규모에서 3기의 대형 돌방과 이 돌방을 둘러싸고 있는 32기의 소형 순장 돌덧널에서 많은 인골이 발견되어 40인 이상이 순장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한다. 이런 대규모의 순장 사례는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으나 부여에 100여 명의 순장이 있었음을 전하는 기록이나 신라 지증왕 3(502) 순장을 금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사회에 순장이 널리 행해졌음을 알수 있다. 또한 역사 기록이 거의 없는 대가야 지배층의 고분에서 대규모 순장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가야에도 고대국가 공통의 풍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창녕 비화가야의 송현동 고분은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주변에서는 벌초를 하고 있었다. 개방되어 있는 고분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현실(玄室)과 연도의 구분이 없고 단순한 장방형이었다. 몸을 약간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었지만, 바닥과 벽은 돌로 쌓았고 천장은 판석으로 덮여있었다. 여기에도 회칠을 하면 얼마든지 벽화를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뜬금없는 상상을 했다. 고구려벽화에 익숙하다 보니 무덤의 벽을 보면 그림이 있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창녕 비화가야의 송현동 고분은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

 

바로 아래에 있는 창녕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8000년 전에 만들어진 통나무 배였다. 2003년 남부지방에 큰 인명 피해를 준 태풍 매미로 낙동강 인접한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유적 일대가 침수되어 복구작업을 하던 중에 바닥에서 패총이 발견되면서 유물 발굴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패총에서 다양한 신석기 유물과 함께 통나무 배가 발견되었다. 지금까지는 경주 안압지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시기의 배가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갈대숲으로 유명한 하왕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 술정리 동 삼층석탑이 있었다.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인 경주 불국사 석탑과 비슷했다. 상륜부는 사라진 채로 있지만, 통일신라 시기 만들어진 불국사 석탑보다 빠른 시기에 만든 이런 탑이 있다는 것은 불국사탑이 술정리 동탑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바로 옆 신라 진흥왕 척경비가 있는 만옥정공원은 기념물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창녕 객사, 창령 현령공덕비, 등이 있고, UN전적비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UN군이 8,9월 두 달 동안 전투를 벌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인천상륙작전과 아군의 반격으로 북진의 기틀을 마련한 공을 기념하는 비였다. 또 한쪽 구석에서 키 작은 척화비도 발견했다.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신미양요 직후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서울 종로 네거리에 세워졌을 척화비를 찾아본 적이 있다. 보신각 앞에서 척화비 있던 곳이라는 표석만 발견했었는데 창녕에 와서 진짜 척화비를 보다니 반가운 마음에 잠시 가야를 잊고 있었다.

 

뿔 모양은 비화가야, 불꽃무늬는 아라가야 도자기의 특징

 

온천물이 나오는 부곡의 호텔에서 1박을 하고 아침 일찍 함안(아라가야)으로 향했다 먼저 군북 지석묘군을 들렀는데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크고 작은 고인돌이 모여 있었다. 특징은 덮개돌에 새겨진 알구멍이 많았다. 26호 고인돌에는 398개의 알구멍이 있는데 이것을 연결해보면 별자리를 나타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바로 앞에는 불꽃무늬가 있는 커다란 도자기 형상이 박물관 앞에 있었다. 박물관을 들어가 보니 아라가야 도자기에는 불꽃무늬가 많이 있었다. 뿔 모양은 비화가야이고 불꽃무늬는 아라가야 도자기의 특징인 것 같다.

 

아라가야는 그다지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대가야를 가는 길에 둘러보는 것쯤으로 알고 박물관을 들어갔는데 불꽃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굽다리등잔, 수레바퀴모양토기, 새모양토기, 말갑옷, 새모양장식미늘쇠 등 아라가야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흔적들이 많았다. 그리고 지도를 보니 말이산고분군과 왕궁지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고분군이 있었다. 둘러보다 말고 1층으로 내려가 아라가야 도록을 사고 싶다고 했다. 이것은 사진을 찍을 일이 아니고 제대로 설명이 된 책을 사서 꼼꼼히 보고 싶었지만, 박물관 직원은 도록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이번 가야답사에서 함안의 아라가야 유물과 유적은 큰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가야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가야는 존재감이 없지만 아라가야는 더 존재감이 없다. 이렇게 많은 유물과 유적이 있는데도 말이다.

 

 

▲ 말머리모양 뿔잔2-복천박물관

 

가야는 500여년 동안 존재했던 나라지만,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등으로 나뉘어져 중앙 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연맹왕국에 머물러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 치이다가 신라에 복속된 나라라고 생각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안다면 가야는 토기와 철기가 발달했고, 해상교역에 유리한 낙동강 유역에 위치해 중계무역을 했으면 금관가야는 전기 가야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가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다 신라 내물왕의 구원요청에 광개토대왕이 기병을 보내 금관가야까지 공격하는 바람에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대가야는 주도권을 넘겨받아 영역을 넓혔으나 금관가야는 신라의 법흥왕 때 멸망하고 대가야는 진흥왕 때 멸망한다는 정도만 알면 학교 공부는 충분하다. 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국가로 기록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흔적들이 있는데 철저히 묻혀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말이산고분의 말이는 머리, 우두머리 즉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발굴되면서 훼손이 많이 되었다. 1986년부터 최근까지 우리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말이산고분군은 약500년 간의 지배층의 무덤임이 밝혀지고 더 나아가 널무덤-덧널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굴식돌방무덤의 무덤양식의 변화와 순장 등도 확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6개의 황금알 중 제일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

 

오후에는 김해 금관가야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었을 9간 들을 상상하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를 부르며 구지봉에 올랐다.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내려오고 줄 끝에 황금색 상자가 있고. 그 안에 6개의 황금알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가 금관가야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다. 구지봉에서 소나무 숲길을 조금 걸어 내려오니 수로왕비릉이 있었다. 왕비의 이름은 허황옥이고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시집을 오면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신비로운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로왕릉 앞에서 20대 전후로 보이는 남학생 두 명이 오랫동안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더니 비각 앞으로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궁금해서 말을 걸어보았다. 학생들은 수로왕 앞에 참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라며, 우리는 김해 사람이니까요 라고 했다. 김해 사람이라는 말이 우리는 가야 사람이니까요 라고 들렸다. 뿌리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오리모양토기나 말머리뿔잔 그리고 아주 큰 항아리들이 인상적

 

마지막 날에는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복천박물관과 복천고분군을 답사했다. 복천고분군은 대성동, 양동리고분군과 함께 대표적인 금관가야 유적이다. 이 일대는 6.25전쟁 이후 판잣집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후 주택개량사업 중 우연히 발견된 고분의 발굴조사 이후 200여기의 고분에서 1만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가야의 박물관 어디를 가 보아도 다양한 토기와 철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복천박물관에서는 오리모양토기나 말머리뿔잔 그리고 아주 큰 항아리들이 인상적이다. 철기로는 갑옷. 투구. 말 갑옷 화살촉 칼 등 무기류가 많이 보이고 다양했다.

저녁마다 세미나를 했다. 순천 운평리고분군을 중심으로 살펴본 대가야의 전남동부지역 진출, 가야의 건국연대 추정, 일본열도내 가야의 분국설로 볼 때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등의 주제 발표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특히 마지막 날 세미나는 한가람과 가야불교연구회에서 함께했는데 지원스님과 도명스님의 발표 주제는 가야불교였다. 가야불교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서 처음 언급된다.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가 아유타국(인도)에서 파사석탑을 싣고 온 것이 기원후 48년이다. 불교에서 탑은 불상이 신앙화되기 전 신앙의 주요 상징물이고, 탑이 들어왔다는 것은 불교가 전래 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불교전래의 최초 기록이라고 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520년이나 엄연히 존재했던 가야가 신화와 전설로 치부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가야불교도 함께 묻혔던 것이다. 이제 가야역사의 복원과 함께 가야불교의 시원을 탐색해야 한다고 했다.

 

낮에 수로왕비릉 아래에 있는 파사석탑(婆娑石塔) 앞에서 한자실력을 동원하여 파사의 뜻을 따져보았지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일행은 음역일 수도 있겠다며 내려왔는데 스님한테서 그 뜻을 들을 수 있었다. ()는 바(bha)의 음역으로 드러내다이고 사()는 사(as)진실한 도리를 의미해서 파사(婆娑)진리가 모습을 드러내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또 경상도 사투리로 환하게 드러난다는 뜻으로 파사하다’, ‘빠사하다라고 말한다고 하는데. 우리말에 아주 익숙하거나 그쪽 사정이 밝을 때 빠삭하다는 말이 있다. ‘빠삭하다의 어원도 파사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한가람회원들의 발표와 함께 이덕일 소장님의 짧은 강연에서 가야의 역사와 한국사의 큰 논쟁 중 하나인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해 주셨다.

가야는 42년부터 562년까지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존속한 고대국가로 가라, 가량, 가락이라고도 불렀다. 삼국유사에서 가야제국(諸國)42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식민사학자들이나 남한의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건국 시기를 3세기 후반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가야를 임나로 둔갑시키기 위한 의도이다. 문헌사료와 고고학적 출토 유물을 근거로 봐서 가야는 서기 1세기경에 건국되었음이 분명하다. 한반도 남부의 가야가 임나라는 것으로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만든 식민지가 임나일본부라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나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 세운 소국이 임나라고 임나일본설을 일축했다.

 

이번 답사는 낮에는 발로, 밤에는 발표와 토론으로 알찬 시간이었지만, 가야에 대해 궁금증은 더 많아졌다.

 

 

▲ 수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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