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東-10] 제나라 환공의 북벌과 발조선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7-05 01: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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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제 환공(BC 685~643) 시기 발조선과 제나라 등의 위치

 자료: 춘추좌전, 관자등을 참조하여 위치 비정 후 구글지도 위에 필자가 그림

 

제나라 환공 시기의 관자에 발조선(發朝鮮)이 등장해 조선이라는 국명이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발과 조선이 별개의 세력인가 아니면 하나의 나라인가에서부터 그 위치가 어디인가, 시기가 서기전 7세기가 맞는가 등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문피가 호표피인가 아니면 해표피인가를 두고도 수많은 논쟁이 이루어졌다. 관자규탁편과 경중갑편의 발조선 기록은 제나라와 발조선 사이의 교역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관자규탁편에서는 환공이 관자에게 나라 안의 진귀한 물산으로 화페를 만드는 일곱 가지 방법에 대해 묻자 관자는 음산의 연민, 연나라 자산의 백금, 발조선의 문피(文皮), 여수와 한수에서 나는 황금, 강양의 진주, 진나라 명산의 증청, 우씨 변산의 옥 등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한 방책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관자경중갑편에서는 사방 여러 나라들의 조공을 활성화하는 방책을 묻자 관자는 발조선이 조공을 오지 않으면, 청컨대 거기서 나는 아름다운 문피와 갓옷을 화폐로 만듭니다. 우씨(禺氏)가 조공을 오지 않으면, 청컨대 거기서 나는 흰 옥을 화폐로 만듭니다...한 장의 표범 가죽은 천금보다 귀합니다. (그것을 화폐로 만든 뒤에야) 발조선이 조공을 올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관자에서 발조선은 아름다운 문피를 생산하는 나라로 등장한다. 그런데 문피는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으로 관복을 만들어 입는다고 하여 해표피가 아니라 호표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발조선 인근의 산융, 고죽, 영지 등이 산악지대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 가죽을 만들어 제나라와 교역을 한 것이다. 그런데 사기흉노열전에 따르면 제 환공 이전에 산융 등이 수차례 중원을 공격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BC 706) 산융이 연나라를 넘어와 제나라를 치자 제 희공은 제나라 교외에서 그들과 싸웠다. 그로부터 44년 뒤에 산융이 연나라를 쳤다.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한 상황을 알려 오자, 제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공격하니 산융은 달아났다. 그로부터 20여년 뒤 융적이 낙읍으로 들어와서 주 양왕을 치니, 양왕은 정나라 범읍으로 달아났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중원 세력들과 동이족들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제 환공 시기에 백적이 중원의 진() 등 여러 나라들을 공격하는데 이를 두고 중원의 나라들과 동북부 제후국들 사이에 선명한 구분선이 그어진다. 즉 동북부의 발조선을 중심으로 산융, 고죽, 영지 등의 나라들은 백적을 지지하고, 중원의 나라들은 백적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백적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제 환공은 북부 제후국들에 대한 북벌을 단행한다. 이에 대해 관자소광편에는 북쪽으로 산융을 쳐서 영지를 제압하고 고죽의 군주를 베니 구이가 비로소 명령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관자대광편에는 환공이 이에 북쪽의 영지 나라를 정벌하고, 하부지산을 공격하여 고죽국의 군주를 참하고, 산융을 막았다(過山戎).”고 했다.

 

관자에 따르면 환공 초기 제나라의 강역은 남쪽으로는 태산의 북쪽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제수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바닷가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기수에 이르러서 땅이 사방 360리라고 했다. 이후 제 환공 시기에 최대로 확장된 강역은 방 오백리였다. 이를 지도로 표시하면 위의 [그림]과 같다. 그리고 발조선은 발숙신의 다른 표현으로서 발해만 연안에 있으면서 제나라와 거의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춘추좌전은공 5(BC 718)의 기사에 “4월 정나라가 위나라 수도 교외를 침공했다...이때 위나라가 연나라 군사를 이끌고 정나라를 공격했다...6월 정나라의 만백과 자원이 제 땅의 사람들을 이끌고 북제(北制) 땅에서 연나라 군사를 깨뜨렸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 환공 직전까지 연나라가 아직 하남성에 머물러 있어 산융이나 고죽도 모두 그 북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관련하여 부사년은 이하동서설에서 (이 본래 계()에 있지 않았으며, ()가 본래 곡북(曲阜)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연, 북연을 구분하면서 연나라가 춘추시대에 이미 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기, 춘추좌전, 관자, 전국책등 중국 사서들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제환공의 북벌 이후 고죽이나 산융은 북부로 밀려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 여러 사서가 밝히고 있듯이 고죽국의 최종 위치는 하북성 노룡현 지역으로 비정된다. 제 환공의 북벌은 중원 세력과 발조선 세력이 분화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이와 관련하여 논어헌문에서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관중은 어질지 못한 사람이지요? 라고 묻자 공자는 관중이 없었다면 중원이 모두 동이족 세상이 되어 자신도 피발좌임 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공은 관중의 북벌에 대해 무도한 행위로 보고 있는데 반해 공자는 화하족 입장에서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리즈 11편에 계속됩니다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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