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백 칼럼] 문재인 정권은 민주적 정권인가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12-29 22: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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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권의 죄악상으로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발전을 후퇴시킨 일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의회 독재의 칼을 휘둘렀고 문대통령은 이에 침묵하고, 나아가 편승했다.
-누군가 좌표를 찍으면 그대로 움직이고 반응한다. 다양성은 없다. 오직 좌표에 따른 반응만 있을 뿐이다. 바로 전체주의가 태동하는 시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권력이 정당성을 얻는 과정은 선거로 구체화된다. 또 하나, 정치권력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정당하게 행사되어야 한다. 권력은 법의 범위 안에서 법에 근거하여 행사되어야 하며, 일부 사람들에게는 유리하게 적용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리하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전자가 정치권력의 절차적 정당성이라면, 후자는 정치권력의 실질적 정당성이다. 이는 또한 아무리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권력이라 하더라도 그 권력이 정당하게 사용되지 않거나 과도하게 남용될 때는 그 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것은 통상 그 권력 사용 기간에 보여주는 지지율로 확인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행태에 대한 지지율이 37%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는 문대통령이 절차적으로 얻은 것보다도 현저히 밑도는 수치다. 우리에게 절차적 민주주의가 절실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소득과 민도의 향상으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질적 민주주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얻어진 소위 ‘절차적 혹은 제도적 민주주의’는 이제 그 역할을 다했다. 문재인 정부는 분명 선거라고 하는 법적ㆍ제도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정통성을 가진 대통령이고 정부다. 민주적 정부이다. 그렇지만 30%대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문대통령은 절차적 의미에서의 권력의 정통성은 확보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실질적 정통성에는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민주주의와 정치발전의 후퇴는 가장 큰 죄악


첫째, 1987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그것이 충분조건을 가지려면 국리민복의 관점에서 행정부의 책무를 담보하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국민이 아닌 그의 지지자들만 바라보고 정치를 했다. 문대통령은 조국에게도, 김현미에게도, 또 추미애에게도 ‘빚을 졌다’고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자리가 한낱 개인의 빚 청산하는 자리인가. 그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못했다. 

 

둘째, 이 정권의 죄악상으로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발전을 후퇴시킨 일이다. 그들의 행태가 보여준 퇴행은 말할 것도 없고, 심리적으로 국민에게 준 퇴행이 무척 크다. 과거에 군사독재는 이미 절차적 제도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시작된 권력이라 그들의 일탈과 독재를 어떤 면에서는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민정부 이후 수차례 선거를 통한 권력의 바뀜을 본 오늘날에 있어 기대했던 민주적 정부가 그것도 시민적 촛불혁명으로 일궈낸 정부가 이토록 오만하고 부도덕한 것이라면 장차 어떤 정부라야 민주적일까 하는 절망을 갖게 된다. 한마디로 권력을 잡으면 저래도 된다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다른 진영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도 이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원한을 남겨 또다른 독재를 낳는다면 이건 국가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 민주주의는 어려운 것이다. 

 

셋째, 더불어민주당은 의회 독재의 칼을 휘둘렀고 문대통령은 이에 침묵하고, 나아가 편승했다. 정경심 교수, 윤석렬 총장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은 그것의 정오(正誤)를 떠나 어떻게 민주주의는 작동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삼권분립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낯설 것이다. 대통령의 재가를 사법부가 뒤엎었으니.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세대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욕망의 끝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권력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인격에 맡기기에는 너무나 뚜렷한 한계가 있다. 요즘처럼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는 때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견제와 균형이다. 

 

삼권분립에 대한 초보적 이해조차 망각

 

인간의 탐욕성과 이기심에 비추어 볼 때, 다수가 갖는 선의 독점과 그로 인한 폭력성은 민주주의가 갖는 또 다른 얼굴이다. 21대 국회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힘의 집중이다. 그래서 부단히 권력은 견제받아야 하고 균형 잡혀서 분산되어야 한다. 그러할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명시되어 있는 민주주의 개념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몇몇의 여당 의원들은 정경심, 윤석렬 재판 결과를 두고 사법개혁이란 단어로 또 갈라치기를 시도하고 심지어 그들을 적폐로 예시한다. 

 

과연 이런 발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나 알고 하는 짓인지 묻고 싶다. 삼권분립에 대한 초보적 이해도 없을뿐더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현격히 후퇴시키는 반민주적 발상이 아닐 수 없고, 아직도 대통령을 왕정시대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유치함의 극치이다. 이게 집권 여당의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의 전부가 아니길 바라지만 180석에 가까운 의회권력을 생각한다면 섬뜩함을 느끼는 것은 결코 기우가 아닐터다.

전체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전체주의가 인류에게 알려준 것은, 문명은 인간의 미래나 공포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어떤 해결책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전체주의는 언제든지 발호할 수 있다. 대학에서조차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반대어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개 “공산주의”라고 답한다. 하지만 틀렸다. 답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단순한 독재와 다르다. 총체적 지배는 오로지 전체주의만이 가능하며, 공존이 불가능한 유일한 통치형태이다. 그것에서 견제와 균형은 없다. 지금 문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들, 그리고 극렬 문지지자들, 나는 그들에게서 전체주의의 검은 그림자를 본다. 사람이 그러할진대 내가 과거에 한 사람을 지지했다고 지금도 지지하고 또 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그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세상의 물정도 변해가는 데 한때의 지지로 무조건적으로 그가 옳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갇혀있는 것은 소아적이며, 그에 대한 지지라고 하나 어쩌면 자기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른다. 

 

나도 한때 정치인 노무현을 좋아하고 지지했다. 그가 야당의 대통령후보로서, 비호남 출신으로 그 척박한 당내 경선 분위기를 뚫으려는 강한 뚝심과 의리를 지녔었기에 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 주변에 소위 ‘노빠’ 부대들을 보면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내가 한때나마 그를 지지했다고 그 모든 것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의 정치와 치적은 물론이고 그의 추종자들의 생각까지 동조해야 하는 강박은 나에게는 난해한 일이었다.

단수의 획일성만이 존재하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


전체주의의 경향 중 또 하나는 사실과 현실에 대한 경멸이다. “‘이해’는 현실이 무엇이든 혹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을 아무런 편견없이 감연히 맞서 이겨내는 것”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사실을 이해하는 능력이야말로 전체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요체다.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묻는 질문을 구별하는 것이 민주적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문 지지자들의 정치적 언어는 사실에 바탕하지도 않고 욕망과 이득에 바탕한 말들로 사실을 지워버린다. 그 말들은 거대한 명분을 뒤집어쓰고 뻔뻔스러워지다 상대에 대한 살벌한 무기로 변한다. 그들은 이미 사실에 대한 이해도, 논리로부터도 멀리 벗어난지 오래다. 전체주의 국가의 모범적인 시민은 ‘파블로프의 개’ 이고, 그들은 행위 대신 반응을 할 뿐이다. 누군가 좌표를 찍으면 그대로 움직이고 반응한다. 다양성은 없다. 오직 좌표에 따른 반응만 있을 뿐이다. 바로 전체주의가 태동하는 시점이다. 

 

대중들이 가치와 원칙으로 서로 연대하지 않고 각자 고립될 때, 언제라도 그들을 조직하려는 전체주의 정권이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세계를 구성하는 복수의 다원성은 사라지고 단수의 획일성만이 존재한다. 대중들이 똑같은 의견을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동일하게 행동할 때 그들은 전체주의의 폭민이 된다. 그곳에 민주주의는 없다. 

 

유영백 편집위원


유영백 미디어 시시비비 편집위원

(정치학 박사/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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