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의 시 맛보기-2011] 정용기-당신은 그리하여

이영 기자 / 기사승인 : 2020-11-08 20:4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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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 몰래 지뢰를 묻었을 테고
당신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 나에게 강매했을 테고

당신은 유월의 장미로부터 수혈을 강요하기도 했을 테고
당신은 구름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대필하게 했을 테고

 

[]

 

 

당신은 그리하여

 

 

 

 

정용기

 

 

당신은 내 손목 붙잡고 저수지로 끌고 갔을 테고

당신은 나를 위해 자정의 수렁을 예약했을 테고

당신은 내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 몰래 지뢰를 묻었을 테고

당신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 나에게 강매했을 테고

당신은 내 안의 광기를 빼앗고 허세를 안겼을 테고

당신은 홍수로 불어난 냇물에 들어가도록 부추겼을 테고

당신은 바다를 지나온 바람에 목줄로 나를 묶어놓았을 테고

당신은 감언이설로 나를 초원으로 불러냈을 테고

당신은 유월의 장미로부터 수혈을 강요하기도 했을 테고

당신은 구름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대필하게 했을 테고

당신은 수만 년 동안 굴러온 돌의 연대기를 작성하는

숙제를 냈을 테고,

 

당신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 테고,

그리하여 내 명치 언저리에 우련한 물무늬가 이따금 환하게 드리웠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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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독특한 방법으로 자기 성찰 중이다. 마음에 이는 욕망과 현실 사이에 서로 다른 인물이 설정되어 있다.

 

인간 내면에 내재된 욕망을 이중구조(二重構造)로 설정하여 신이거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시를 읽으면서 로버트 루스트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과 하이드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구조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란 꿈과는 다른 세계로 치닫는 일이 너무나 많다.

 

당신은 내 안의 광기를 빼앗고 허세를 안겼을 테고

젊은 날의 열정을 뒤로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해야만 하는 삶은 새로운 일을 향한 도전을 포기하게 만든다. 도전이란 실패의 확률도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의 벽이다.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 되는 일이란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는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착한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또 다른 세계의 탐구자일 수도 있다.

 

그렇게 전반과 중반으로 이어지다가 후반부 끝 연

내 명치 언저리에 우련한 물무늬가 이따금 환하게 드리웠을 테고

에서 처연하게 삶을 반추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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