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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소설-이성직] 묻지도 생각지도 말고-③ |
대포는 아침 일찍 역전으로 나가 미친개에게 당분간 일이 있어 출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후 소장과 몇몇 사람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짧게 전하고 서둘러 회사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낯익은 얼굴들이 손을 마주 잡고 안부를 전하며 기뻐하는 것도 잠시, 모두는 굳은 표정으로 연수원 버스를 타고 출발합니다. 단합대회 겸 새로 시작하는 일과 경영의 어려움 기타 제반 사항을 열거하고 토론한 후 각각 정해진 부서를 찾아 떠나는데 대포는 한사코 현장근무를 고집하며 움직이지 않습니다. 생산부서가 아니면 절대 가지 않을 것이며 부득이 영업부로 발령낸다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단단히 버팁니다. 결국, 총무부에서 의견조율이 다시 이루어지고 대포의 고집대로 생산1과 과장으로 변경되어 발령이 납니다. 총무부장은 왜 사서 고생을 하려 드느냐, 현장에 가면 부품조립 라인을 들여다봐야 하고 허구한 날 야근이나 특근을 밥 먹듯 해야 하는데 괜찮겠느냐,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고 단단히 이릅니다. 대포는 빙그레 웃으며 제가 이번 기회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듯 맨발로 뛰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총무부장은 도통 알 수 없다는 듯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암튼 잘 해보게, 라는 말과 씁쓸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섭니다.
생산현장으로 돌아온 대포는 500톤이라는 유압프레스의 웅장한 위용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기계의 요소와 금형 등을 세세히 훑어봅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현장근로자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갖가지 기능을 익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철판에 커다랗게 구멍을 뚫고 암나사를 내는 레디알 머신과 고열의 가스 용접기 및 절단기 금형의 면과 홈을 절삭하는 밀링 머신, 갖가지 핀과 축, 나사, 프렌치와 베어링 커버를 가공하는 선반 등 다채로운 기계의 원리와 작동법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익힙니다. 제품이 흘러나가는 컨베이어의 작동원리를 터득하고 그 앞에서 쉬지 않고 불량품을 찾아내는 숨은 고수의 눈빛을 어깨너머로 훔쳐보기에는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이 짧기만 합니다. 현장 직원들은 때아닌 불청객에게 가끔 눈치와 통박을 주기도 하지만 도통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드는 대포에게 결국 마음을 열어주고 맙니다. 기름 묻은 작업복과 무거운 안전화가 넥타이와 구두보다 좋아 보이고 현장 일에 책상과 펜이 반드시 필요치는 않다는 것을 깨우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투박하고 싸늘한 강판을 두들기고 비틀고 접어서 하나의 제품이 완성되듯 시급제 근로자의 삶도 굴곡 많은 세상 통로를 따라 하염없이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행여 불량품으로 낙인찍혀 고통스러운 고철 통에 쑤셔 박힌 채 용광로에 들어가 재생산 과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될까 두려워 반듯하게 선 자세로 매서운 주위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오롯이 컨베이어 라인을 따라 정해진 공간을 빈틈없이 채워갑니다. 쉴 새 없는 기계작동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의 손을 비웃으며 앵무새 입버릇을 버릴 줄 모르고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줄기차게 맴돌고 있습니다. 인간이 필요로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인지 기계를 위해 인간이 필요한 것인지를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제품은 쏟아져 나오고 급하게 수습하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달려들어 제각각 위치를 선점하며 고수합니다. 생산에 중독되어 이끌려가는 시간은 어느덧 계절을 성큼성큼 옮겨다 놓았습니다. 창밖에 매달린 고드름이 맥없이 떨어지고 산등성 초록은 차츰 가깝게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날이 풀리자 동네에는 이사하는 집이 무척 늘었습니다. 아랫동네에는 어느새 중장비가 들어서서 건물을 무너뜨리고 널브러진 가재도구와 재개발 현수막이 뒤엉켜 서로를 노려보며 눈을 홉뜨고 있습니다. 머리를 풀어헤친 먼지 바람은 황사를 감싸 안으며 제멋에 취해 공중을 방황하다 작업 인부가 쏘아대는 물줄기를 피해 달아나며 대찬 욕지거리를 퍼부어댑니다. 나이 많은 노인 몇몇은 현장 인부들 감시 감독의 눈을 피해 헌 옷가지와 종이박스 쇠붙이 등을 끌어내며 헛헛한 웃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삶인데 백 년 이상을 버틸 것같이 집을 장만해 살아야 되는 것이며 죽고 나면 필요 없는 것을 주야장천 살 것같이 붙들고 매달려야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남들은 하는데 가만있으면 껄끄럽고 이유 없이 손해 보는 것 같아 악착같이 달라붙어 씨름하다 보니 상대의 뒤집기와 배지기의 혼미한 상황을 틈타 마지막 승부수 잡채기 한판승으로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아든 대포는 당분간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이 돌자 회사에서는 봄맞이 야유회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두 한꺼번에 움직이면 생산에 지장이 있어 각 부서별로 날짜를 정해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생산1과 대표인 대포는 소요산을 추천했고 직원들은 무조건 재미있게 지내다 온다면 어디라도 좋다는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대포는 여러분이 저를 믿고 뜻을 한곳에 모아준다면 이 한 몸 바쳐 흥겨운 오락을 목표로 서슴없이 설레발이 치겠으며 타고난 저마다의 끼를 이끌어내는 버벅거림을 주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으나 자신만만한 대포의 표정을 보고 힘을 실어줍니다.
휴일 저녁에 역전광장에 발을 들여놓은 대포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발길을 재촉합니다. 어둠을 먹어치운 역전광장은 제각각 발길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간간이 서성대는 인파는 높다란 곳에서 양팔 벌려 춤추는 시계탑을 쳐다보고 대책 없는 어둠의 독백을 뇌까리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 속에 한정된 몸부림을 주고받으며 인파를 헤쳐나가는데 낯익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찹니다. 다름 아닌 미친개가 역전 옆 공원 풀밭에서 노숙자들과 붙어 앉아 앙증스런 술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대포는 성큼 다가가 누가 남의 자리에 침 바르고 있어 궁금했는데 역시 우리 식구 아닌가? 하며 일행을 비집고 쪼그려 앉습니다. 졸지에 황망한 세숫대야를 맞닥뜨린 일행은 주춤거리며 가재도구를 수습합니다. 순간 대포의 차림새를 알아챈 미친개가 반갑게 맞으며 어정쩡한 일행들에게 잘 아는 형님이라고 소개를 하자 잠시 긴장됐던 눈빛은 이내 풀려 축 늘어집니다. 대포는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자며 일행을 일으켜 세우고 넉넉하게 망가진 몇몇은 느긋한 걸음으로 앞장서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동안 행적을 자세하게 설명한 대포는 미친개에게 소요산 관광버스 예약을 부탁하고 시간이 있으면 동행하자고 제의합니다. 미친개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인력사무소 소장에게도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한 다음,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대포는 술안주를 비롯한 음식 계산을 끝낸 후 식당 문을 나섭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예의를 표한 미친개 일행은 남아있는 음식을 포박한 채 몽롱한 쥐약의 고문을 거듭 이어갑니다. 이마를 들이받은 전봇대를 욕하며 한잔을 마시고 벌떡 일어나 싸대기를 갈기던 아스팔트를 꾸짖으며 또 한잔을 비우고 덩달아 함께 덤빈 간판을 노려보며 또 한잔을 넘기고 긴박한 상황에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신발짝을 두드리며 또 한잔을 삼킵니다. 고문에 힘겨운 쥐약은 쥐를 버리고 약만 남아 돌아다니고 헐렁한 눈동자에 갇힌 약발은 설움에 맺힌 각각의 눈자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회사야유회에 부득불 동행하겠다는 아내고집을 꺾지 못한 대포는 불편한 심정으로 역전을 향해 걸어갑니다. 발길 가는 데로 툴툴거리며 역전을 돌아서자 약속한 인파가 눈에 들어오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씬한 관광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막힌 통로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순간 낯익은 젊은 여인 둘이 아내에게 손짓을 하자 어느새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서 있던 아내가 이것 좀 들어 주실래요, 짐이 무거워서……. 대포는 뒤엉키는 필름을 수습하다 한쪽에 숨어있는 미친개가 눈에 띄자 허리를 쥐고 쓰러지는데, 대포에게 보따리를 넘긴 아내는 큰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모두 묻지도 생각지도 말고 시간만 깨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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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직 소설가 |
이성직 소설가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2007년 『시와 창작』 소설등단(『바닷가 풍경』)
-스토리소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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