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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소설-이성직] 묻지도 생각지도 말고-① |
이른 아침 총총걸음으로 전철역을 향해가는 대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서로 먼저 가겠다고 순서 없이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급기야 인내심을 잃어버린 대열은 끼어들기와 급차선 변경, 신호 위반에 맞물린 회전위반, 급정거 등 할 수 있는 위법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고약한 상황을 차례대로 끄집어내어 분류하기 시작하는데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잘못을 반성하고 다소곳이 머리 숙여 처분만 기다리며 수긍하는 자세를 보이면 벌점 없는 일만 원짜리 범칙금통지서로 끝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예의가 어긋나는 인상이 보이면 즉시 육만 원 과태료에 벌점 20점을 얹어 발부하기 시작합니다. 나오는 족족 불러 세워 족치기 시작하자 암암리에 상호 간 교류를 통하여 골 아픈 잡새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머릿속 교차로와 간선도로는 여기저기 번쩍거리는 불빛 속에 원활한 교통흐름이 이루어집니다.
식전 댓바람에 끌려 나온 고깃덩어리는 판로가 급해서도 아니고 촌각을 다투는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도 아니며 부지런히 사지육신 놀리는 것이 몸에 밴 것은 더욱 아닙니다. 어이없는 상황은 잘 나가던 직장을 퇴사한 지 5개월째라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봉급을 고용보험으로 대치하며 정처 없이 떠돌았으나, 이젠 기진맥진하여 진퇴양난입니다. 혹여 집에서 눈치챌까 봐 가슴 졸인 지 어느덧 백여 일이 지났건만 새로운 직장 문턱은 아스라이 멀기만 합니다. 판로가 막힌 고깃덩어리를 끌고 여태 해왔던 것처럼 단련된 심신으로 꿋꿋이 버티고 나갈 것인지, 외로운 진열장을 포기하고 사실을 고백한 후 마음이라도 홀가분해질 수 있도록 가부간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매불망 대포를 바라보는 아내와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하고 있는 공주에게 자칫 실망을 줄까 두려워 본의 아닌 자작극을 하는 것입니다. 마침 손꼽아 기다리던 오늘은 돈을 만져 볼 수 있는 고용보험 받는 날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초조해지고 급해지는 것입니다.
아내 몰래 퇴직금을 정기예금으로 넣던 날 설마 구차한 실업자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전혀 생각대로 흐르지 않았고, 막상 길거리를 헤매다 보니 같은 차림새와 동급 부류들이 차차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는 겸연쩍은 눈빛들은 항상 같은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각각의 병기로 무장한 아군이며 적군이었습니다.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물러나는 패잔병은 수두룩하였고 누가 누구를 쏘지도 않았는데 가슴 아린 상처를 감싸 안고 치유하는 것은 능수능란하였으며 맨손으로 덤벼도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존심은 세상을 거꾸로 보며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절규하며 통곡하던 선배의 아픔을 눈가에 이슬 맺힐 때 느껴보았고 식당에 홀로 앉아 밥숟가락 쥐었을 때 입안에서 맴도는 밥알의 반항에 목구멍이 젖어 드는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목메어도 큰기침으로 누르고 가슴 치며 두 주먹으로 허공을 두들겨 패는 것이 배우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도 감정의 기복이 들고날 때 배웠습니다.
아침 일찍 서두른 수고로 많은 사람을 제치고 선두에서 돈을 수령한 대포는 잠깐 여유로움을 간직하며 무작정 큰길을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작심하고 끊었던 담배를 빼 물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삼십 대 후반 정도 되는 여인들과 눈길이 마주치고 그들 체구에 비해 커다란 보따리와 무거운 가방으로 눈길이 옮겨집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던 여인들이 ‘죄송하지만, 역전광장 근처까지 들어다 줄 수 없겠느냐.’고 예의 바르게 간청하자 말없이 곁으로 다가섭니다. 가방을 잡으려는 순간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나타나 커다란 보따리를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대포에게 눈짓으로 가방을 가리키며 조그만 미소를 던집니다. 여인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오늘 참 재수가 좋은 날인가보다 여기저기서 고마운 분들이 나타나는 걸 봐서 날을 잘 잡은 것 같구나, 하는 웃음소리에 맞춰 요염하게 허리를 흔들며 두세 걸음 앞서 걸어나갑니다.
광장 구석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얘기를 나누고 있으며 그들을 태우기 위한 늘씬한 관광버스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흥겨운 가락은 막힌 통로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는데 마침 남은 좌석이 있으니 함께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목적지는 경기도 소요산이라고 일러줍니다. 대포가 머뭇거리며 망설이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친목계원들과 동네 선후배,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들인데 서로 잠깐 시간 동안 즐거운 여행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고 왕복 차비와 경비를 포함한 금액이 삼만 원이라며 눈웃음칩니다. 그때 작업복 입은 사내가 ‘저도 동참하고 싶지만 가진 돈이 이만 원밖에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하며 발길 돌리는데 대포 곁에 있던 여인이 멋진 오빠가 만원을 보태주면 되겠네, 하면서 팔을 잡아당깁니다. 순식간 이루어지는 상황과 설레는 분위기에 쉽사리 돌아서지 못한 채 결국 대포는 사만 원을 여인에게 쥐어주고 사내 역시 대포에게 공손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버스에 오르게 됩니다.
예상과는 달리 음주 가무를 기본사양으로 탑재한 사람들은 좁은 통로에서도 유연한 동작으로 민첩하게 움직이며 차체가 흔들리고 멈칫대는 것과 상관없는 복원력이 탁월하고 지극히 균형적인 몸가짐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한바탕 이어지는 소란에 대포는 감히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아 곁에 앉은 사내와 눈 맞춘 후 개인신상보고서와 호구조사 등 지극히 일상적인 주민 사생활을 상호 간 전달하게 됩니다. 사내의 나이는 스물여덟이라고 하니 한참 아래 막냇동생뻘이라 별다른 수식어 없이 반말을 사용하고, 사내 역시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형님으로 부르길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포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자 일용직으로 여기저기 떠돌며 일하고 있는데 오늘은 작업현장에 자재가 도착하지 않아 출근과 동시에 퇴근이 되었다며 씁쓸히 웃습니다. 보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하루에 팔만 원이라고 하면서 야간작업을 하면 사만 원을 더 받는데 요즘엔 정시에 끝나는 게 일반화되어 예전처럼 벌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혹시 하는 궁금증에 아무라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사지육신 놀리는 데 부담 없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으며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몸 팔아 돈 먹는 일이기 때문에 약간의 신체적 고통은 참아야 한다며 빙그레 웃습니다.
대포는 요즈음 할 일 없이 방황하는 신세라고 하며 나도 일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내는 처음 하는 사람은 칠만 원이고 인력회사에서 수수료 칠천 원을 제하는 것인데 역전 오른쪽에 있는 인력사무소 앞 공터에 모여 각자 팔리는 데로 찢어지는 것이라 늦어도 새벽 5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매일 아침 자신은 그곳에 있으니 미친개를 찾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며 세상에서 남의 돈 먹는 게 가장 힘든 것인 만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작업복과 안전화는 반드시 구비해 오라고 합니다. 내일 아침 만나자고 흔쾌히 대답한 대포는 미친개라는 야릇한 별명이 참 인상적이라서 다시 한번 사내를 쳐다봅니다. 서로는 겸연쩍은 눈빛을 피해 잠시 숨을 고르고 대포는 갈 데까지 가버린 줌마렐라의 흐느적거림과 누구의 삶을 눈물로 채운다는 가사를 귀에 담으며 영원히 뜨지 않는 짝퉁 삼류의 안타까움을 뭉뚱그려 창밖으로 패대기칩니다. 졸지에 버림받은 엉성한 그림책은 초가을 바람에 매서운 귀싸대기를 맞으며 방황하고 언뜻언뜻 스치는 퇴색한 나뭇잎이 서둘러 달아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차 안 풍경은 각개전투가 활발히 진행되는 중입니다.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고지를 탈환한 무리는 개체 간 상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나 홀로 여행을 기치로 한 독야청청의 고지인데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을 잠재우기 위해서 이곳저곳 나타나는 적군은 상당히 많습니다. 시장경제 원리는 이곳에서도 벌어지는바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으므로 하나의 상품을 건져가기 위해서 진열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우성치는 인파를 둘러보는 상품은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높아집니다. 우습기도 하고 웃기지도 않는 상황은 성별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케케묵은 사고를 들이대기도 합니다. 약간 상식 있는 선수는 찍은 데 또 찍고 바로 옆을 찍은 후 안 찍은 데 골라 찍는 상당히 지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도도한 콧대와 수많은 작전세력을 감당한 고수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엎어집니다.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간단한 도시락과 음료수를 받아든 일행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간밤 내린 가을비가 채 가시지 않은 산은 갖가지 색감을 베어 물고 제법 운치를 더해 줍니다. 뿔뿔이 흩어진 인파는 행적이 묘연하고, 형체가 제각각인 나무기둥만이 계절이동을 한 몸에 받으며 버티고 있을 때 대포는 맥주 한 병을 사 들고 미친개와 함께 나무 밑에 대충 자리 잡은 후 조촐한 점심 식사를 합니다.
약속된 시간에 버스로 돌아오니 예정된 인원은 오간 데 없고 처음 만났던 여인 둘과 육십 초반의 어르신 몇몇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시간을 잘 못 안 것일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두 사람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 병 밑바닥에 남아 찰랑거리는 맥주를 마저 마십니다. 시간이 잠깐 흐르고 운전기사가 돌아오더니 주위를 한번 휙 둘러본 후 거침없이 시동을 걸며 차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대포는 당황하여 ‘아저씨! 아직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차를 출발시키면 어떡합니까?’ 하며 다급한 소리를 지릅니다. 기사는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고 미친개는 그저 무표정하게 창밖으로 눈길을 준 채 말없이 앉아 있습니다. 대포는 황망한 사태에 어리둥절해 있는데, 점잖은 어르신이 다가와 ‘여보게. 그 사람들은 각자 제 갈 길 찾아간 거야. 아마 이번 여행이 처음인 것 같은데 어쩌다 짜고 치는 판에서 나가리 패를 쥐었는지 참 안타깝구먼.’ 하며 빙그레 웃습니다. 이제 시끄럽게 구는 사람도 없고 먹을 것은 많이 남았는데 갈 길은 멀었으니 시간이나 죽여 보자는 호탕한 너스레와 웃음소리를 싣고 버스는 유원지를 돌아 나와 번듯한 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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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직 소설가 |
이성직 소설가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2007년 『시와 창작』 소설등단(『바닷가 풍경』)
-스토리소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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