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승자가 독식하는 현 선거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가장 시급한 사회적 의제들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망이 전혀 없는 정체된 사회로 굳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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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1368) |
우리는 어떤 현상을 이해하려면 언어라는 수단을 가지고 접근할 수밖에 없다. 언어라는 그물로 세상을 이해한다.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현상을 파악할 수 없고,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면 현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언어는 '지배의 언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을 지배하는 자가 쓰는 언어를 따라 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언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오히려 현실의 지배를 더 강화하게 되는 역설이 생겨난다.
우리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의 언어를 통찰해야 한다. 현실을 잘못된 언어로 이해하는 자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대표적인 거짓말이 '한국 정치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사회가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과두 지배하는 사회이다.
어제 아침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유럽의 다양한 정치 지형에 비해, 우리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 해오고 있는 구도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것을 '수구(守舊)-보수(保守) 과두지배(oligarchy)라 불렀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 대 진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보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이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한다. 반대로 개인을 공동체보다 더 중시하는 쪽이 자유주의이다. 보수가 공동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바로 가장 근원적인 공동체로서 민족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래 보수주의자는 대부분 민족주의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보수라는 자들은 민족을 경시하고 외세에 붙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무리이다.
그리고 보수가 그다음으로 중요시하는 것이 역사이다. 전통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과거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보수의 태도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자들은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한다.
끝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문화도 중시한다. 세련된 언어를 쓰려고 노력하고, 품위와 품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언어나 태도를 보면 정말 끔찍하다. 우리는 이들을 '수구'라고 한다.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외세와 손잡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무리이다.
요즘 ‘영끌’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영혼까지 끌어모았다.’는 의미의 신조어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는 뜻이다. 특히 2030세대 영끌은 미래를 끌고 갈 젊은이들이 평범하게 노력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도 얻을 수 있는 게 만만치 않다는 서글픈 시류를 반영하고 있다. 2030세대가 영혼까지 끌어모으거나 팔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2030대만 문제는 아니다. 나도 그렇다. 그래 오늘 아침 사진은 무심히 서 있는 저 푸른 소나무와 더 녹색을 띠는 어린나무들의 하늘에 드리운 검은 구름이 지금 우리 사회를 반영한다. 오늘 아침은 슬픈 시를 읽는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낡은 벽시계/고재종
사회복지사가 비닐 친 쪽문을 열자
훅 끼치는 지린내, 어두침침한 방에서
두 개의 파란 불이 눈을 쏘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산발한 노인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보이고, 노인의 게게 풀린 눈과
침을 흘리는 입에서 알 수 없는 궁시렁거림,
그 위 바람벽의 사진 액자 속에서
예닐곱이나 되는 자녀 됨 직한 인총들이
노인의 무말랭이 같은 고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마지막으로 모여들게 되는
그 무엇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이 귀착점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고양이의 형광에 저항하며
노인의 극심한 그르렁거림을 지탱시키느라
사회복지사는 괘종시계 태엽을 다시 감는다
우리 사회의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도 거짓 언어 속에서 축복받고 있다. 국제적 기준으로 보면 진짜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현 정부의 노동정책, 경제정책, 복지정책 등을 보면 그렇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복지정책을 가진 나라이다. GDP 대비 정부의 재정지출 비율이 보여준다. 복지국가란 정부가 충분한 재정지출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이 초래한 실업과 불평등 문제 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재정지출 규모를 보면 그 나라의 복지 수준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재정지출 비율은 고작 25%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다. 유럽에서는 많은 나라가 대체로 50% 정도의 재정지출을 보인다. 2018년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가 52%, 스웨덴이 49%, 독일이 46%. 미국이 32%이다. 한국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정부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사회보장 정책을 펼 수 있겠는가?
김우창 선생은 우리 사회를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규정했다.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은 승자는 턱없이 오만하고, 패자는 너무나 깊은 모멸감을 내면화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 삶이 그렇다. 우리 사회는 한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서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기가 너무도 힘든 사회다. 정부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교육, 주거 등에 있어 나 몰라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지출이 높은 나라는 당연히 세금이 많은 나라이다. 우리는 세금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다. 자기가 낸 세금에 비해 자신이 받는 혜택을 별로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조세 저항이 거의 없다. 시민들이 자신이 낸 세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중에 되돌려 받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이같은 왜곡 현상은 우리가 분단체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수구는 이 분단체제에 기생하여 70여 년을 연명해온 세력이다. 반공주의와 독재가 수구 역사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소위 진보라고 하는 세력들은 진보인 척하면서 개혁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골몰해 온 세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재벌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들을 '기업 살인'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어떻게 정의로운 과세를 실현할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살인적인 경쟁에서 해방시킬 것인가?
·어떻게 학벌 계급사회를 혁파할 것인가?
지난 70년 동안 한국 정치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한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권력을 분점해왔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오늘날 정치 민주화와 경제 성장,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이 된 근본적인 원인이다.
지금까지 이런 수구-보수 과두지배가 가능했을까? 김누리 교수에 의하면, 그것은 잘못된 선거제도 때문이다. 즉 승자독식의 단순 소선거구제 때문이다. 지역구에서 1등 하나만 뽑는 거다. 이것은 민의를 왜곡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선거제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선거 제도는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김교수는 이를 "4분의 1 대의제'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40%를 득표하면 지역구에서 당선된다.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율이 대체로 60% 미만이기 때문에 당선자들이 실제로 받는 표는 전체 유권자의 25%, 즉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25%가 100%를 대표하는 거다. 나머지 4분의 3의 의사는 어디에서도 대표되지 않는다. 거기서 여의도 정치와 민의의 괴리, 표심과 민심의 차이, 국회 정치와 거리 정치의 이반이 생겨나는 것이다. 대의제도 자체가 왜곡되는 것이다. 승자독식의 정치 문화를 조장하고, 수구-보수 과두 지배체제를 유지시켜 온 근원 원인인 것이다.
우리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킬 이런 정치 세력이 정말 필요하다.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정의를 구현할 세력
·일상에 위협으로 다가온 생태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할 세력
우리의 승자가 독식하는 현 선거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가장 시급한 사회적 의제들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망이 전혀 없는 정체된 사회로 굳어갈 것이다. 우리나라가 수차례의 민주 혁명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더 지옥이 되어가는 이유는 이러한 구조적인 결함에 있다. 불평등, 실업, 비정규직, 재벌개혁, 교육개혁 등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이 제대로 개혁되지 않는 것이 이 구조적인 문제이다. 또 한 번 말하지만, 구조적인 문제가 우리의 정치 구도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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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10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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