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1485)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12-24 12: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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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고, 나누고, 융합하라 (3)

전문가는 그저 일꾼일 뿐이다. 전문가는 많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제너럴리스트에게 자신의 영역에 대한 책임 있는 결과를 제공하는 일꾼일 뿐이다. 제너럴리스트는 일꾼의 일거리를 만든다. 지금 그리고 미래에 필요한 인재는 제너럴리스트이다. 일꾼은 로봇으로 충분하다. 현재 학교가 로봇을 잘 만들고 있다.

융합은 제3의 지식, 변형된 물질이 되어야 한다. 그래 퓨전 혹은 용광(鎔鑛)과 비슷한 것이다. 융합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는 인공지능의 주인이 되는 능력, 즉 공감 능력과 창조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주부터 나는 며칠간에 걸쳐서 인공지능의 주인이 되는 나를 만드는 법을 이진성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8가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라"는 주장을 오늘 또 한다. 참고로 이진성 작가가 말하는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이 8가지이다.

 

1. 디지털을 차단하라

2. 나만의 '평생유치원'을 설립하라

3. 노잉(knowing)을 버려라. 비잉(being)하고 두잉(doing) 하라

4. 생각의 전환, '디자인 씽킹(designe thinking)' 하라.

5. 인간 고유의 능력을 일깨우는 무기, 철학 하라.

6.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라.

7. 문화인류학적 여행을 경험하라.

8. ''에서 '', '우리'를 보라.

 

며칠 전부터 <정희진의 융합>이라는 칼럼을 여러 번 읽었다. 왜냐하면 융합(融合)이라는 말을 잘 정리하고 싶어서이다. 첫 칼럼 제목이 "융합은 지향이 아니라, 방식이다"였다. 이 말을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알고 있는 융합은 '다른 것을 합치는 것'이라고만 알았다. 그러나 정희진 작가의 말에 따르면, 융합은 무조건 합치자는 지향이 아니라, 합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말 같다.

 

나는 융합이라는 말과 '통섭(統攝)'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정 작가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통섭의 시대에는 노동자 한 명이 모든 일을 한다." 내 생각으로도 통섭은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는 노동자의 인명 경시를 통한 비용절감을 '통섭'이라는 말로 자본과 자본가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융합하기 위해 복수전공 하라는 말도 틀린 말이라고 정희진은 꼬집는다. 그래 융합하는 사람이나 통섭하는 사람이 전문가의 반대인 교양인은 아니라고 본다.

 

전문가(스페셜리스트)와와 교양인(제너러리스트)을 다르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전문가들이 제너럴리스트, 즉 교양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에 관한 책도 읽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전문가들은 삶과 세계에 대한 빅 피처를 그리지 못하고, 디테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우리도 이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교육인 '아르테스 리베랄리스(artes liberalis)에서 가르치던 트리비움 교육이 회복되어야 한다. 지난 1217일 글쓰기에서 트리비움에 대해 공유한 적이 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써 둔 적이 있는데, 융합을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 다시 소환해 본다. 이제는 누구도 전화번호를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대신 이젠 그 노력을 삶의 훨씬 더 중요한 일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긍정적인 일이다. 그게 기술, 특히 ICT가 일으킨 혁명적인 사건 때문일 것이다. ! 내 스마트 폰이 그렇다. 그러나 나는 혹시 나의 공부가 전화번호를 500개 외우게 하던 이전 시대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는 게 아닌지 항상 뒤돌아본다. 다음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의 박원호 교수 칼럼을 읽고 정리한 생각이다.

 

"근대적 지식의 생산과 재생산(교육)은 사실 철저하고 끊임없는 구분 짓기'에 기초한 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연구가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분화한 것처럼,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도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 정치학으로 분화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분화가 분절화라고 할 만큼 더 세부 전공으로 나뉘어지고, 더 전문화가 진행되었으며, 높은 학문 간 장벽을 세운 채 상이한 분석방법과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큰 질문을 던지고 거시적으로 유효한 대답을 구하는 통찰을 잃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각자의 바늘같이 특화된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할 이야기가 더 이상 없어졌으며, 더 중요하게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이해하고 이들과 대화할 공간도 극단적으로 좁아지게 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사회의 변화 앞에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던지는 난해한 문제들과 감염병의 일상화라는 심대한 도전 앞에서, 우리들의 공부 그리고 우리들의 학술과 교육을 그 근본에서부터 다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스페셜리스트들이 이상화되고 호명되어왔고, 호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슬로건이 있었으며, 이들을 대학이 가장 짧은 시간에 스페셜리스트로 키우는 것, 그리고 이들을 가장 빠른 시간에 기업과 사회가 가져다 쓰는 것이 이상적 모델로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효율만 생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성, 지력이다. 지성이란 "혈연과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 우주적 합일을 지향하는 고매한 정신활동"이라고 고미숙은 정의한다. 그 답은 책 속에 있다. 그래 자기 전공이 아닌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겐 교양인(제너럴리스트)들이 정말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제너럴리스트가 나는 인문운동가라고 본다. 이 인문운동가에게 필요한 것이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는' 일이다. 이런 인문운동가, 제너럴리스트가 되려면, "깊이를 가지되 매몰되지 않고 세상을 읽고 시대를 통찰하며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줄 학술과 지식을 갖춘 인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부분에 대한 전문성과 함께 전체를 조망할 능력이 있는,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스스로 고민하고 찾아낼 창의적이고 행복한 인재를 기르는 교육, 진정으로 존재의 다양성을 체험하는 교육이 되어야"(박원호) 하고, 또 우리는 그렇게 공부를 따로 더 해야 한다.

 

사실 우리 공동체가 눈앞에 두고 있는 근본적 위기가 새삼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은 우리를 미래로 안내해 줄 유일한 희망은 결국 공부를 통해 얻는 지식과 학습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는 그저 일꾼일 뿐이다. 전문가는 많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제너럴리스트에게 자신의 영역에 대한 책임 있는 결과를 제공하는 일꾼일 뿐이다. 제너럴리스트는 일꾼의 일거리를 만든다. 지금 그리고 미래에 필요한 인재는 제너럴리스트이다. 일꾼은 로봇으로 충분하다. 현재 학교가 로봇을 잘 만들고 있다. 그래 우리가 추구하는 마을대학은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제너럴리스트', 모든 일에 능숙하기 보다는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제너럴리스트를 만드는 일이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에서 'general'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인'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군에서 '장군'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장군은 하나의 전문화된 특기는 없지만, 군에서 돌아가는 대부분을 알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제너럴리스트는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을 두루 갖추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종합적으로 사고한다. 그 반대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소위 전문가로 한 가지 분야에 깊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 오늘도 나는 산책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을 키우기 위해 아름다움을 찾아 찍는다. 그리고 시를 읽는다. 오늘 아침도 멋진 시 한 편을 공유한다. 오늘부터는 이 시를 산책하며 큰 소리로 낭송할 생각이다.

      


사랑하는 것은/박경옥

     

 

숲 속에 사는 바람이고 싶었습니다.

그대 거기 서서 날 기다린 것처럼

당신에게로 달려가 기억속의 그 눈물

산 벚꽃 하얀 잎으로 덮어주고 싶었습니다.

떨고 있는 어깨 위로

가만히 지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사막 한 가운데 모래바람 무수히

별처럼 뿌려지는 언덕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입니다.

 

별이 지는 새벽하늘에

붉은 꽃 한 송이 숨겨놓고

눈물 나게 그리운 가슴만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언젠가

사막이 바다가 되는 날 아침

차마 하지 못한 간절한 말은

붉은 빛으로 하늘에 피어날 것입니다.

그리운 이여 그때까지.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라"는 말을 하다가 여기까지 흘렀다. 융합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구별이 없게 하거나 하나로 합하여 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이다. 중요한 것이 그냥 합하는 것이 니라, 구별이 없거나 하나가 되게 합하여 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말로 최근에 통섭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좀 따져 볼 일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The Unity of Knowledge)>2005년에 한국에 번역 출간되면서 통섭(統攝)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다. 윌슨의 통섭(consilience)"실제로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별개로 확립되어 있는 분야들을 종합(synthesis)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윌슨은 각각 전문화되어 있는 학문 간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가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는가? 간단히 말해, <통섭>은 근대에 이르러 대학이 대중화되면서, 학과가 다양해지고 지식이 세분화된 상황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이다.

 

나는 여기서 마음에 드는 말은 '()'자이다. ''자의 한자 모양이 흥미롭다. () 하나와 귀()가 세 개가 결합되어 있다. ''은 소곤거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귓속말을 뜻한다. 여기에 '()'이 결합되어, 잘 들리지 않으므로 귀에 손을 대어 끌어들이는 것이다. 나도, 정희진 작가처럼, ''은 좋은 데, '(, unity)'이 불편하다. 차라리 한문을 이 '()자로 하면 좋겠다. 윌슨이 말하는 '통섭'이란 말에는 다학제(多學制), 간학제(間學制)로 쓰이는 데, '화학적'이라기 보다 '물리적'인 뉘앙스가 강하기 때문이다.

 

윌슨의 책을 번역한 최재천 교수는 다학제, 간학제를 넘어 "이제는 진정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일관된 이론의 실로 모두를 꿰는 범학문적(transdisciplinary) 접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통섭의 시대를 맞이하는 길이다"라 말한다. 영어의 올(all)이 아니라 '드랜스(trans)'를 범()이라고 말한다. 영어 'trans'는 말 그대로 하면 '변화(translation)'이다. 한국어판 부제의 "지식의 대통합", '모든 지식을 다 공부해서 묶는다'로 읽으면 안 된다. 가능하지도 않고 불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통섭은 단지 질적 변화인 횡단(橫斷, trans/versal) 작업이다. 위계(hierarchy)가 끼어들면 안 된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융합은 통섭과 좀 다르다. 위애서 말했던 것처럼, 융합(融合)은 말 그대로 하면,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융합과 절충(切充)은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 합한다고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을 나열하는 절충은 '가장' 대립하는 두 가지 개념에서 '제일' 좋은 것만 나열하는 사고방식이다. 개념들의 접목이 융합이 되려면, 무관한 개념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반대 개념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충돌과 모순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를 절충으로 해소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좋은 말의 나열은 아무런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갈등 봉합이 주요 목적이다. 충돌 과정을 없애는 것이다. 절충이 대개 지당하신 말씀, 진부한 표현, 영혼 없는 연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절충에는 좋은 것들 둘 다 가졌다는 '자기 위로'만 있다. 즉 현실에서 불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에 실행력을 가질 수 없거나, 실행된다면 반사회적 언설이 된다. 물과 기름은 절충될 수 있어도 융합 될 수 없다, 물과 기름이 분리된 채 컵에 담겨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절충), 융합은 계면 활성제(계면할성제)를 사용하거나 기름의 입자를 나노 크기(10억분의 1m) 정도로 줄이는 과정을 통해 마요네즈 같은 제3의 물질을 만들어낸다.

 

융합은 제3의 지식, 변형된 물질이 되어야 한다. 그래 퓨전 혹은 용광(鎔鑛)과 비슷한 것이다. 융합은 '범학문'이라는 표현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다. 융합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이 만나서 새로운 앎을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융합은 '횡단적 사고, 사선(斜線)으로 보기, 크로싱, 조우(遭遇, 우연히 서로 만남) 등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대립하는 논리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융합은 충돌을 지향한다. 합치지 말고, 충돌 양상을 질문해야 한다. 융합은 충돌하고 같이 도약하는 과정(jumping together)에서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인문운동가 박한표님이 2 days ago에 게시

라벨: 202012월 사진과 글 그리고 시 복합와인문화공간 뱅˜샵2 인문운동가 박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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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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