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다름이 가치 있게 다뤄지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존재 이유를 상실
민주주의는 무한히 이어지는 경기…선수들은 상대를 완전히 짓밟아서는 안 돼
국민들은 각자가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있다면 과감히 그로부터 벗어나야
총선이 앞으로 겨우 10여 일 남았지만 국민들은 그렇게 기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어느 때보다도 한국의 정치가 극단을 치달으며 진영으로 갈라져 치러야 하는 선거여서 더욱 그러하다. 이미 여야 모두 공천 과정에서 보여준 난맥상은 22대 국회가 시작도 되기 전에 국민적 기대를 꺾어놓았다. 그 당의 정체성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끌어다 나무 심듯이 꽂아놓은 공천, 시스템이라 하기에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인물들의 등장, 그토록 문제가 많았던 그 과정에서 가차 없이 드러나는 인간의 저열한 본능까지 봐야 하는 국민들은 누구를 위한 선거이며, 과연 저들이 진정한 우리의 대표이며 선량인지에 회의(懷疑)를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여야가 전쟁을 치르듯 서로에게 막말과 전의(戰意)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한가롭게 민주주의를 논하느냐고 핀잔을 주어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의 한국정치가 위기 상황이라고만 하고 답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 선거 때만 되면 당장의 승리만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대증적이고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한 결과, 제헌 국회 이후 22대까지 와도 달라지지 않는 게 한국 정치다. 답을 찾기 어려울수록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가 무엇이고 또 우리가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총선에 즈음하여 되돌아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는 깨어지기 쉬운 허약한 통치체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민주주의의 완성인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꽃은 오로지 선거를 통해서만 활짝 피어난다. 하지만 그 꽃이 제대로 피려면 선거의 행위자인 우리 유권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선결 요건으로 요구된다. 양편으로 갈라서 ‘묻지마’ 행태의 투표는 애당초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당이 과반을 넘기거나 그보다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가는 것은 지난 21대 국회에서 목도 하였듯이 유권자인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다수의 횡포와 폭주로 이어질 뿐이다.
민주주의(democracy)는 ‘주의(ism)’라고 번역해서 생긴 오해로, 이념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통치체제다. 우선 통치체제로서 민주주의는 매우 허약한 체제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 다루면 깨어지기 쉽고 언제든지 다수를 앞세워 전제정(專制政)으로도 변모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그 어떤 정체보다도 가장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는 힘에 의해 서로가 지배받는 것은 야만이며, 법의 주권과 이성의 가르침에 따름으로써, 그 제도 안에 내가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은 시민 개인의 권리에 의해 ‘제한된 국가’로의 지향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잘 이해하는 또는 적어도 민주적 생활 방식과 일치하는 품성을 기른 시민들이 있어야 하며, 그들로 구성되어지는 다원적 사회로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적 사회로 발전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최근 ‘촛불시위’ 이후부터 지난 대선 과정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가치 지향과 의견, 열정들을 하나로 획일화하면서 진영으로 편 가르며 단원적인 사회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공론의 장은 소멸해갔고, 시대와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언론의 자유, 이견, 비판은 허용되기 어려워졌다.
『현대정당론』의 저자 조반니 사르토리의 표현을 따르면, 민주주의는 단순히 ‘인민의 권력’이 아니라 ‘인민에 대한 인민의 통치’ 또는 ‘인민을 통치하는 인민의 권력’이다. 민주주의는 훈련, 지식, 지혜의 정도가 모두 다른 시민들에게 정치에 똑같이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여 다양한 정당과 파벌이 집권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렇다 보니 통일성과 일사불란함보다는 분열과 변화, 다양성을 장려한다. 이에 필연적으로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 갈등을 조율하는 것이 정치가 갖는 본래의 기능이다. 정치는 진리 싸움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는 신앙과 다르다. 차이와 다름이 가치 있게 다뤄지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라는 규범
진영 간 대립이 공론장을 해체하고 사회를 양분하며 극단적인 갈등으로 몰아갈 때,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제도들은 순기능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그것을 담보해주는 윤리와 규범은 작동하기 어렵고, 오로지 ‘법대로’만 남는다. 진영 간의 양극화는 선거의 승자로서 여당과 패자로서 야당 간 타협과 협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게 한다. 격렬한 여야 갈등 상황은 정치 과정 전체를 일상적 선거 캠페인으로 전환시켜 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대한 국가적 이슈들이 정당 간 타협과 합의를 통해 입법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하다.
미국의 트럼프 당선 직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민주주의조차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은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두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민주주의를 지켜주었던 것은 헌법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규범이었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두 가지 규범은 상호 관용(mutual tolerance)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다. 상호 관용이란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를 뜻한다. 선거에서 져서 슬프지만 선거 패배를 재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하나, 제도적 자제란 제도적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려 들지 않는 것으로, 비록 그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기존 체제를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무한히 이어지는 경기다. 경기가 이어지려면 선수들은 상대를 완전히 짓밟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처럼 상대를 적대시해서도 안 된다. 상대 팀이 떠나면 더 이상 경기는 없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정치인이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일 때 그들은 자제의 규범도 기꺼이 실천하려 든다. 선순환이다. 하지만 상호 관용의 규범이 허물어질 때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정당이 서로를 위협적인 적으로 간주할 때 정치 갈등은 심해진다.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정치가 갈등을 부추기고 증폭한다. 이 경우 선거 패배는 일상적인 정치 과정의 일부가 아니라 재앙이 된다. 패배의 대가가 심각한 절망일 때 정치인들은 자제 규범을 포기하려는 유혹에 넘어간다. 그 결과 정치에서는 합법을 가장한 극단적 전술만이 횡행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정치 집단이 서로 간 공존이 불가능한 이념으로 분열될 때, 특히 구성원끼리 교류가 부족하고 고립이 심해질 때 정상적인 정당 경쟁이 사라지고 적대적인 투쟁이 시작된다. 결국에는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반체제 집단이 등장한다.
유권자인 국민들이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행과 공고화를 순조롭게 거쳐 현재에 이르렀지만, 사회적 요구와 가치, 열정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갈등을 제도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정치는 실종되고 오로지 정치의 사법화만 난무한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퇴행을 거듭하다 급기야는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
4월 10일 총선. 그 결과가 결코 어느 한쪽의 재앙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번 총선에서는 어느 정당이든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어느 한 정당의 압도적 우위의 다수 의석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는지 4년 동안 보아왔다. 정치권은 마치 이번 총선이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거나 절체절명인 것처럼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된 선거의 결과들을 보면 선거 결과 때문에 정작 우리네 삶이 멈춘 적도 없거니와 한껏 고양된 적도 없다.
국민들은 각자가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있다면 과감히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정권도 사람도 때마다 순리대로 바뀌는 정치 과정의 하나라는 생각으로 투표해야 한다. 국가적 대의와 미래 세대들을 생각해야 한다. 각 당의 후보 선출 과정과 후보들의 면면들도 들여다보고, 그리고 어떤 정치인이 필요한지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 스스로를 비이성적 열정과 적대를 둘러싸고 있는 폭력적 상황에 내던져 놓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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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백 편집위원/ 민주평통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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