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1464)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12-03 07:05:49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AI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최적의 답을 계산해 움직이지만, 인간은 이런 계산을 거부할 수 있다. 배고프더라도 먹지 않고, 피곤하더라도 눕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의지력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승리의 환호성을 함께 지를 수 있는 다수자, 즉 대중이 되고 싶어 하지 변방에 있는 고독한 소수자, '위대한 개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뇌는 중앙 지휘 본부가 따로 있어 각 부분으로 명령을 내리는 시스템이 아니다. 정신과 뇌가 완전히 독립

    

AI시대에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공감 능력과 창의성이다. 그동안 인간 고유의 활동으로 여겨져 왔던 지적 노동의 대부분을 AI가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데이터이며, 새로운 데이터를 창조하는 능력만이 인간 존재 역량이 될 수 있다.

 

뇌과학이 인간의 학습은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고리, 시냅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혔다. 이에 바탕으로 컴퓨터 기술은 인공신경망이라는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이 인공망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든 다음 거기에 빅데이터를 집어넣어 인공신경망 스스로가 학습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반복되는 몸의 활동이 어떤 이해하지 못하는 장애물 앞에서 섬광처럼 찾아온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뇌가 아니라, 몸 전체를 통한 온갖 감각의 진동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뇌에 저장된 정보인 기억도 데이터가 아니라, 현실의 사건을 통해 끊임없이 그 기억이 재해석되는 서사 또는 은유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능과 유사해진다고 우려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의지력이라고 했다. 정보가 옳고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보를 판단하는 도구로서의 지능에서는 인간과 AI 간 차이가 좁아질 수 있지만, 이런 도구를 활용하는 의지력에서는 AI가 인간을 따라올 수 없다.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는 능력 역시 AI와 인간을 구분 짓는 또 다른 차이점이다. AI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최적의 답을 계산해 움직이지만, 인간은 이런 계산을 거부할 수 있다. 배고프더라도 먹지 않고, 피곤하더라도 눕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의지력이다. 데카르트는 합리적인 것에 도달하기까지 방법적 회의로 의심하라고 했다. 그건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인간만이 의심하고, 부정한다. 거기서 진리를 찾는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이 시를 알게 된 이후, 나는 간장 게장을 먹지 않는다. 아침 사진은 나의 산책로 탄동천에서 찍은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날이었다. 젊은 학생들과 일을 하니 좋다. 잠시 짬을 내 이제야 겨우 시간이 나서 아침 글쓰기를 마감한다.

 

 

 

스며드는 것/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그리고 마음은 뇌의 활동이지만, 뇌의 활동은 "인간을 '의지-생각-행동'의 체계로 동작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각각은 또 각자의 삶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갈 수 있는 '플랫폼(platform)'이다. 마치 피처폰에 대별되는 스마트폰과 같은 개념이다. 제조사에 의하여 폰이 발휘할 수 있는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폰의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스마트폰은 플랫폼이다.

 

"뇌에 저장되는 기억들은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렸다. 자신의 감각의 문을 얼마나 자주 오랫동안 열어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 입력되는 자극들은 저장되어있는 기억들을 들뜬 상태로 만들며 기억과 기억들 간의 새로운 조우와 새로운 경험을 유발하여 새로운 앎을 기억하게 한다. 그런 훈련이 잘 이루어진 사람들은 외부 자극 없이도 저장된 기억을 바탕으로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통합하고 또 새로운 앎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그 앎은 의지력을 강하게 한다. [문제는] 이런 뇌의 훈련을 스스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감각의 문을 열려고 의지를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뇌는 노력하는 젊은 사람들의 뇌보다도 저장된 기억이 적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는 앞서가는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찰'을 보여줄 수가 없고, 항상 젊은 사람들과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이순석)

 

그러나 뇌는 정신이 아니다. 정신을 연구할 때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실체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뇌는 온몸으로부터 전해오는 정보들과 환경에서 조합된 정보를 받는다. 모든 정보가 뇌로 들어와서 우리가 마음이라고 여기는 감각을 생산한다. '심리작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뇌의 어떤 부분이 특별한 활동에 더욱 많이 관여한다. 뇌 전체가 '디스트리부티드 모듈(distributed modules 분산되어있는 모듈)'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뇌에는 수백억 개의 뉴런이 있고, 전문화된 국소 회로인 모듈이 연결되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 뇌 과학자들은 이 연결을 발견하고 그 정체를 확인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지금은 이러저러한 정신적인 상태가 실제로 어떤 상호작용에 의해서 비롯되는지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싯다르타가가 말한 "마음은 실체가 없다. 단지 하나의 작용이다"가 뇌과학의 주장과 같다. 신장은 소변을 생산하고, 뇌는 마음을 생산하다. 뇌는 모든 심리에 관여한다. 생각, 사고의 형식, 다양한 선입견이 작동하는 정신적인 상태를 생산하는 뇌 활동에 대한 추론들이 많다. 마음과 뇌도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적용해서 파워포인트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진행되는 작용이다.

 

마음은 뇌의 작용이라는 스티븐 핑거의 말보다, 마이클 가자니가가 말하는 마음은 분산되어있는 모듈들이 서로 작용하면서 상향식으로 올라간다가 더 잘 이해된다. 꼭대기에 전지적인 감독이 있어서 의식을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의 작용이 변화하는 심리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인간의 몸 어딘가에 의식과 의지가 따로 존재해서 그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게 한다고 오래도록 생각해 왔다. 그러나 뇌는 중앙 지휘 본부가 따로 있어 각 부분으로 명령을 내리는 시스템이 아니다. 정신과 뇌가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인간이 법을 만들었지만, 그 법이 다시 인간을 제약하는 것처럼, 뇌는 물리적인 과정을 거쳐 정신을 생산하지만, 그 정신이 뇌를 제약하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우리 안에 수많은 자아가 있다고 설명한다. 자아를 드러내는 작동들을 바로 분산된 모듈의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나? 항상 변화한다. 입력된 상태에 따라 선택은 수시로 바뀐다. 무엇이 입력되는가에 따라 계산되어 나오는 것이 기분(감성, mood)이다. 이를 인문학에서는 정서라고 한다.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말이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에게 육체적, 지적 노동을 빼앗긴 현실 조건에서 창의성을 요구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그리고 인간이 생산해 내는 언어나 또 시청각적 창작물을 데이터로 환원한 후 다시 빅테이터로 삼으려는 기술공학적 발상은 존재 자체를 비트(bit)로 환원시키는 퇴폐적인 모험일 수 있다. 왜 우리는 이러한 퇴행을 막지 못할까? 인공지능 시대에는 데이터가 무형의 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자본 '주의' 세상이기에 발생하는 이념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승리의 환호성을 함께 지를 수 있는 다수자, 즉 대중이 되고 싶어 하지 변방에 있는 고독한 소수자, '위대한 개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에도 그런 논리가 적용되다고 황규관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지극히 일반화된 논리와 어휘를 무비판적으로 구사하려는 욕망들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데, 나는 그것들을 '빅데이터가 되고 싶어하는 글쓰기'라고 부른다." 이슈에 대한 깊은 사유를 생략한 채, 독자들에게 아부하며, '좋아요'를 구걸하는 글들이다. 황규관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인공지능 시대의 자본이 되려는 욕망에 가깝다. 진정 창의적인 글은 빅테이터가 되기를 거부하는 글이다. 이런 글쓰기를 '소수자 글쓰기'라고 부른다." 나도 '소수자 글쓰기'기 보다, '빅 데이터가 되고 싶어하는 글쓰기'에 살짝 스며든 어쩔 수 없는 자본의 노예가 아닌가 반성하며, 뜨끔했다.

 

라벨: 202012월 사진과시 그리고 글 20209월 사진과시 그리고 글 복합와인문화공간 뱅샾62 인문운동가 박한표

https://pakhanpyo.blogspot.com

 

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10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주요기사

+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