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한여름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올망졸망 우리들을 꼬옥 안아 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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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의 시 맛보기-2009] 성배순 –여름 지나 가을 |
[시]
여름 지나 가을
성배순
근처 산이란 산에 밤꽃이 지천인 지금은
길쭉하니 노란 수꽃이 작고 동그란 암꽃을 품에 감춘 지금은
비릿함을 바람에 실려 동네방네 퍼뜨리는 지금은
밤나무들이 기억한 내 인생의 일화가 향기처럼 퍼지고 있네
뾰족구두에 양산을 든 밤꽃 냄새나는 여자를 데리고
아버지는 개선장군 마냥 5년 만에 나타났는데
밥해라 이부자리 펴라 주문도 당당한데
아버지의 여자에게 풀 먹인 홑청 이불을 새로 꺼내주고
어머니는 한여름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올망졸망 우리들을 꼬옥 안아 주는데
수꽃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암꽃이 점점 둥글게 자라는 지금은
하얀 솜털 수꽃이 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가는 지금은
할머니는 서방 잡아먹었다며 어머니한테 악다구니를 쓰는데
어머니 배 속 알밤은 토실토실 잘도 자라고
젊디젊은 아버지 사진을 제사상에 놓고
눈앞이 흐려져 잘 안 보이는구나 얘야
이제는 네가 밤을 치거라
어머니는 내게 칼을 넘겨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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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엄마의 일기장이다.
슬픈 일기장임엔 틀림없으나 그 안에는 깨어있는 정신이 있다.
강인함이 살아있다. 여자는 죽었지만, 엄마는 살아 토실토실한
알밤을 부화한다.
시인은 이런 강인한 모정의 배경에서 자랐다. 그러면서 애틋함과
연민만이 아닌 좀 더 큰 세계의 눈을 가졌다.
‘젊디젊은 아버지 사진을 제사상에 놓고
눈앞이 흐려져 잘 안 보이는구나 얘야’
역설적으로 엄마는 고난의 세월에 대한 원망 아닌
아버지를 향한 연민의 정을 내비친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있었던 시인은
극대화된 세월의 배경을 담담히 지켜보고 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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