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소설 춘추오패] 제9화. 결국 혼자였다

김백 기자 / 기사승인 : 2026-08-01 09: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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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속에 스러진 관중, 허망하게 끝난 제환공의 시대
충신의 마지막 경고를 외면한 군주, 패권은 그렇게 무너졌다

 

 

서력 BC 645, 제환공의 즉위 40년이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기다리던 봄이 왔는데 관중은 덜컥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8,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나를 어떻게 평할까!”

세월을 되돌아보니 자못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운이 좋았다. 그것도 아주 좋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외로웠다. 그가 살아오면서 제일 힘든 게 관계였다. 40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서 경륜을 폈지만, 정치란 언제나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대부들에게는 관중의 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었고, 관중에게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고 어제오늘의 말이 다른 아이러니 같은 존재였다. 고독은 인간의 원죄일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특별히 나약한 개체의 표시도 아니다.

정치하는 이들이 입만 열었다면 주장하는 백성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이제 마감의 시간, 그가 이룩한 성취는 창밖을 데우는 봄기운에 비하면 너무도 하찮은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가린 가림막을 걷었다. 창 너머 저만치 밑동이 넓은 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죽어 있었고, 주변에는 새 풀이 돋아나 있었다. 새들이 그루터기나 우듬지 여기저기에 둥지를 틀었는지 쉴 새 없이 들락거린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곤충도 먹이를 찾아 드나들고 있을 것이다. 벌레들은 갈참나무숲에 저절로 생겨났고, 자신을 음식 삼아 새들을 불러 모았다. 그래서 죽은 등걸은 살아 있는 존재들과 신비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살아온 자취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후세의 기억 속에서 살아 있듯이, 과연 죽은 나무는 불멸의 모습이었다. 관중은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저 나무가 바로 인간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 진정한 생명이란 지상에서의 삶에 한정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 너머의 세상을 내다보는 자각과 이승의 인연을 내려놓음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제환공이 문병을 왔다. 군주는 방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퀴퀴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재상의 병이 이리도 깊은 줄 몰랐소. 만약에, 말이요. 재상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구와 정사를 의논해야겠소? 포숙아에게 맡기면 어떻겠소?”

포숙아는 군자입니다. 공명정대하고 직분에 충실합니다. 다만, 워낙에 강직한 탓에 타협을 모르는 결점이 있습니다. 쿨럭쿨럭.”

그러면 습붕에게 맡기면 어떻겠소?”

젊은 시절,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다투면서 세상 풍파를 헤쳐왔던 대부들이 이제는 거의 떠나고 습붕만이 남았다. 이때 공손습붕은 재상부에서 관중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관중은 임금에게 빙긋 눈웃음을 보였다.

습붕이면 무난합니다. 하늘이 습붕을 세상에 내려 신과 손발을 맞추었습니다. 다만 임금께서 오래 부리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하기야 습붕도 이미 칠십이 가까운 노인이다.

그러면, 다음으로 역아(易牙)에게 맡기면 어떻겠소?”

재상은 단박에 고개를 흔들었다. 임금이 고쳐 물었다.

()는 어떻겠소? 혹시 개방(芥芳)?”

역아와 초, 개방은 제환공을 가깝게 모시는 측근들이다. 세상은 그들 삼인방을 삼귀(三鬼 세 사람의 귀신)라고 불렀다. 그중 역아는 말을 매끄럽게 잘하고 솜씨가 뛰어난 요리사 출신이다. 어느 때 역아는 임금에게 자신의 세 살 난 아들을 삶아 고기로 대접했다. 제환공이 그 내용을 알고서 기겁을 했으나, 그 충심만은 심금을 울렸다. 초는 제환공의 총애를 받는 미동 출신이다. 말하자면 남총(男寵, 동성애 상대)이란 말이다. 남색에 대해 관대하던 시절이라 미소년을 잠자리에 부르는 일이 흔했다. 특히 전쟁터에는 여인을 데려가지 못했기에 소년을 곁에 두고 외로움을 달래는 것을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영리한 초는 나이가 들자 스스로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되었다. 엄청난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궁형을 자처할 만큼 초는 집착이 강했다. 성 기능을 상실한 대신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문고리 권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개방은 위나라의 공자 출신으로 환공에게 누이 둘을 첩실로 바치고 신임을 얻은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들 중 언니를 위희(衛姬)라 부르고 동생을 소위희(小衛姬)라 하였다. 특히 언니가 임금의 사랑을 받았고 그만치 개방에 대한 신임도 깊어졌다. 이 시절의 제환공은 본인의 말을 거스르는 일이 없는 삼인방을 최고로 신뢰하는 충신으로 여겼다. 대신들이 삼인방을 멀리하라고 상소를 올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심 없이 군주를 보살펴주는 자들이다. 단순히 음식을 나르고, 옷시중이나 드는 심부름꾼이 어찌 국정을 농락하겠는가? 단지 여론이 좋지 않다고 그들을 내친다면 앞으로 누가 과인과 함께 일을 하겠는가?”

이런 삼인방을 재상감으로 지목하다니? 관중은 새삼 군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일흔이 가까웠으나 유감스럽게도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인품을 갖추질 못했다. 이는 관중 자신의 탓이기도 하다. 너무 오랫동안 조정의 대사를 독점하다 보니 임금이 오히려 신하에게 의존하는 관계를 만들었다. 관중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역아, , 개방, 이 세 사람을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역아는 제 자식을 죽여 주군께 신임을 얻고자 하였고, 초는 스스로 내시가 되었습니다. 개방 또한 천승의 나라 공자 자리를 팽개치고 주군의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욕심이 크다는 증거입니다. 신이 지금까지 이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것은, 그들은 봇도랑 같은 존재들이라 신이 버티고 있는 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이 주군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들을 멀리하셔야 합니다!”

지나치게 임금을 무시하는 직설적인 언사였다. 그러나 관중의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읽어낸 제환공은 금세 마뜩잖은 기색을 털어내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종래는 쓴웃음을 지으며 궁으로 돌아갔다. 불쾌해진 것이다. 평생을 의지하던 관중과 사이에도 어느 순간에 침묵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며칠 뒤 관중은 외롭게 죽었다. 죽음이란 인간의 영혼이 육신의 고치를 찢고 우화(羽化)하는 과정이며, 온전히 혼자만의 몫이었다. 그가 죽던 날 창밖에서는 때아닌 눈이 내리고 있었다.

 

▲AI 생성 이미지

 

사마천은 사기열전(史記列傳)에서 관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관중의 재산은 제나라 공실만큼이나 많아서 과연 제환공의 치세가 관중과 함께 이룬 것임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그런데 제나라 사람들은 누구도 관중을 두고 욕심이 많았다거나,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의 정치는 훌륭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 이상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관중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제갈공명은 관중을 교훈 삼아 필생의 노력으로 강유(姜瑜)라는 후계자를 양성하였으나 강유 역시 스승의 책략과 사상을 올곧게 본받지는 못하였다.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말이다. 역사는 시대적 소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 운명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제환공은 공손습붕을 재상으로 삼았다. 습붕은 겨우 6개월 만에 관중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어서 포숙아가 재상의 소임을 맡았다. 그도 1년 후 친구의 뒤를 따랐다. 능력 있는 후계자를 멀리하고 만사를 본인들이 관장하던 그들 1세대가 죽자 조정은 삼인방이 독주하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관중이 죽고 3년 뒤 제환공도 죽었다.

재위 43, 춘추 72세였다. 그의 죽음은 더욱 참담하였다. 후계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탓에 궁중에는 암투와 긴장이 돌았다. 환공 자신도 말년에는 방술이나 신선이 되는 도술에 빠져 회춘과 불로장생에 매달렸다.

결국 여희의 소생인 공자 무휴를 등에 업은 삼인방에게 독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혹자는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워낙에 삼인방이 임금을 안팎으로 에워쌌으므로 그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시신은 죽은 자리에 버려진 채 자식들이 군위 다툼을 벌였다. 어느 쪽도 상대를 쉽게 제압하지는 못했기에 다툼은 두 달간이나 지속되었다. 당시의 참상을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환공이 죽자 마침내 다섯 공자가 서로 싸웠다. 이에 궁중이 비어 감히 장례를 치르는 자가 없었다. 시신이 그 자리에 버려져 있기를 67, 벌레가 문으로 기어 나올 정도였다.”

43년간이나 중원의 방백으로 천하를 쥐락펴락하던 제환공. 죽은 지 불과 두어 달인데, 흐르는 시간은 이상한 힘으로 인간의 감정을 바꾸어 누구도 제환공의 치세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죽음과 패업의 단절은 실로 허망해서, 한순간에 스러져가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았다. 결국 송나라 군주, 송양공(宋襄公)의 지원을 받은 세자 소()가 사태를 수습하고 제효공(齊孝公)이 되었다. 제효공은 효도 효() 자가 들어간 시호처럼, 아버지 환공에게 극진한 예우를 바친 거 말고는 별반 한 일이 없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말하는 못난 후손일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제환공은 사람 부리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의 주위에는 관중, 포숙아, 습붕, 동곽아 등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는 없다. 천심(天心), 즉 하늘의 소명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천심은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 움직이는 성질을 지녔다. 돌이켜보면 환공이 왕실의 구석(九錫)을 따라하면서 거들먹거릴 때 이미 하늘은 그를 외면한 건지도 모른다.

제나라 공실은 전통적으로 대부들의 신권이 강력하여 뛰어난 군주가 나타나기 어려웠다. 제환공과 관중이 없는 제나라는 다시 귀족들의 합의제 시스템으로 돌아갔고, 나라의 이익보다 실권자의 사익에 따라 정치가 베풀어졌다. 그들은 전쟁의 승패와 국가의 미래보다 자신의 탐욕을 우선하였고, 군주는 이를 제어하는 능력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제환공 생전에도 패자로서 위업만 찾았을 뿐이지 땅 욕심을 부리지 않다 보니 별반 실속은 없었다. 제환공의 패권은 바로 추억이 되고 그 영광은 춘추라고 불리는 한 시대의 역사 속에 묻혔다. 그는 춘추의 회맹체제를 연 개척자로 남았다.

 

한 완 (韓 莞) 작가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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