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 삼경이 되자, 달이 없는 대신에 별이 떴다. 별은 남쪽 하늘에 한 줌이 뿌려졌다. 구름은 동쪽에 있었고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워 기대했던 데로 그믐밤이었다. 바람도 없어 깃발조차 날개를 접고 숨죽였다. 간간이 화톳불과 보초의 횃불이 일렁거릴 뿐, 그마저 서너 마장 뒤에는 끝없는 어둠에 묻혔다. 사방 천지가 어디가 뭍이고 어디가 물인지 분간조차 어렵다.
황하와 장강이 또 한 번 맞붙은 천하 대전 필(邲) 땅의 전쟁! 처음 내지르는 창 질은 유격대장 오삼의 몫이었다. 팔백의 유격은 얼굴과 손에 숯 검댕을 칠하고 창칼 날에는 누더기를 감아 빛을 숨겼다. 이마에 누런 수건을 동여매 표식으로 삼고, 부시를 챙겨 적의 후방으로 침투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외곽 초소에 걸려 부싯돌 한번 때려보지도 못하고 참살되었다. 적의 본진까지 도달한 군사는 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마치 물고기가 어망을 빠져나가듯 막사 주위를 누비면서 불을 질러댔다. 말먹이 건초 더미에서부터 일어난 불길은 때맞춰 불어온 밤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화광이 충천하고 연기가 사방을 덮었다.
“불이다! 불이닷!”
“어디? 어디! 이게 무슨 소리냐?”
놀란 말들이 들쑤시며 미쳐 날뛰는 통에 혼란은 배가 되었다. 불은 인간에게도 공포를 불러왔다. 귀신들의 세상이라고 믿는 그믐날 밤에 당하는 야습이라 심리적 충격도 컸다. 외곽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불길이 치솟는 걸 보고 뛰어 들어오다가, 본진 군사들과 맞닥뜨렸다. 어둠 속에서 서로 뒤섞이다 보니 상대를 알 수 없는 막막함이 사람을 질리게 하였다. 공포의 비명은 수십 배가 되어 그들 자신에게 돌아왔다. 너도나도 칼과 창을 휘두르며 아군끼리 죽고 죽이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기습이다. 적이 난입했다!”
“쳐라! 죽여라! 이 도적놈들!.”
식겁을 한 부장 선곡도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당황하지 마라. 각자 자리를 지켜라. 적은 몇이나 되느냐?”
“동시다발적으로 불길이 솟는 걸 보니 몇천은….”
“듣기 싫다. 이런 멍청한 놈,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우리 군사다. 적은 몇 놈 안 된다. 진정들 해라. 우리끼리 싸우지 마라!”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사태를 알아보고 침입자를 찾아내서 도륙하는 수색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도 수십, 수백 군데 막사와 건초더미에 불이 붙어 화광은 제멋대로 충천하고 있었다. 그 시각, 마침내 초의 본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노려보던 군사들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보았다. 방화는 한두 군데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하여 중천까지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짜릿한 흥분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이제나저제나 어둠 속을 주시하던 왕이 벌떡 일어났다.
“출격 준비는 되었는가?”
“예! 언제든지….”
이어서 길게 한 번, 느리게 두 번, 공격의 신호인 고동 소리가 장중하게 울렸다. 왕이 친히 북채를 잡았다. 둥! 두둥, 둥둥둥…. 느리고 긴 파장을 남기며 울리는 큰 북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심장에 시동이 걸렸다. 쿵쾅대는 고동이 요동치면서 사냥감을 앞에 둔 매처럼 눈빛이 번들거린다. 장졸들은 천지가 진동하듯 엄청난 함성을 쏟아냈다.
“와! 와아아!”
“우왁! 우와와아악….”
고함은 중군에서 시작되고, 이에 화답하여 전군이 노도와 같이 함성을 질렀다. 흥분하고 기세가 오른 그들은 저마다 자랑하는 무기를 쳐들고 멀리 너울대는 화염을 향해 돌진했다. 초저녁부터 긴장 속에서 출격 명령을 기다리던 군사들이다. 소리치고 환호하면서 미친 듯 돌진했다.
선봉을 맡은 악백과 자염백 휘하에 젊은 장수들이 특히 무섭게 설쳐댔다. 좌우익에 속한 장수들도 혹시 뒤처질세라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달렸다. 흥분과 광란의 봇물이다. 투레질하며 대기하던 말들도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니 나머지도 엉겁결에 내달렸다. 말은 눈이 좋아서 밤에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장애물에도 부딪치지 않는다. 달도 없는 그믐밤이지만 화광이 선명하여 방향은 명백하였다. 하나같이 선두에 서고자 자빠지고 엎어지며 앞으로 내달렸다. 길이고 뭐고 없었다. 키 작은 관목은 타서 넘고, 바위에 걸려 엎어지고 넘어지면서도 한사코 달렸다. 새 떼는 날아오르고 놀란 짐승은 마구잡이로 달아났다.
보졸들도 경주라도 하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렸다. 개활지의 크고 작은 숲과 나무와 개울물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나무에 부딪힌 군사들이 벌렁 나자빠지고 뒤집혔으나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관목은 그대로 타고 넘고 개울물은 첨벙거리며 짓쳐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인간들의 출몰에 여우가 깩깩 비명을 지르고, 놀란 직박구리가 나무 위를 날다가 덥석 올빼미의 부리에 걸려들었다. 조용하던 그믐밤 필(邲) 땅은 갑자기 울리는 북소리와 장졸들의 함성으로 세상천지가 진저리를 쳐댔다.
군사들은 적진 앞에 도달하자 일제히 활부터 쏘아댔다. 표적은 제대로 겨눌 수 없었고, 어른거리는 실루엣을 향해 쏘아대는 소위 눈먼 화살들이다.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빨려들듯이 어둠을 뚫고 날아갔다. 진군(晉軍)은 어디서 어떻게 화살이 오는지도 모르고 살에 맞아 죽어 나갔다. 보이지 않는 만치 공포는 더욱 컸다. 상대는 어둠 속에 있었고 자신들은 화광이 충천한 밝은 곳에서 과녁받이가 되고 있었다. 당황한 보초병은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칼을 휘둘렀다. 경황없는 와중에 악머구리 끓듯 저마다 고함치는 소리만 요란했다.
“적이다! 적! 적이 습격했다. 속히 응전하라!”
“불을 꺼라! 말을 풀어라! 중군은 이쪽으로 모여라!”
장수들도 막사를 뛰쳐나가거나, 부하 병사를 부르거나, 도망치거나 제각각이었다. 고함에다 비명, 창칼이 부딪치는 쇳소리, 말 울음소리에 중군이 들끓자 잇달아 나머지 군영도 난리를 쳤다. 갈팡질팡하는 군졸들의 발길에 장작불이 흩어지면서 연기와 안개까지 뒤섞였다. 무기까지 버리고 도망치는 자, 남의 무기를 챙겨 들고나오는 자, 무기를 찾는 자, 욕설을 퍼붓는 자, 고함을 지르는 자들로 혼란은 극에 달했다. 형제가 있는 자는 형제를 찾아다녔고, 친지가 없는 자는 길을 따라 무작정 달아났다. 장수들은 깃발을 휘두르며 목청을 높였고, 북새통 중에도 화살은 억수 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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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아군의 유격대라고 화살이 비껴가는 것도 아니었다. 오삼도 날아오는 살을 피해 마구간 옆으로 몸을 숨겼다가, 엉겁결에 대여섯 무리와 맞닥뜨렸다. 아차, 하필이면… 왼쪽의 적을 베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무어라 외쳤는지 소리는 듣지 못했다. 뜨겁게 달군 쇠에 찔린 듯 통증을 허리 위에 느꼈다. 등 뒤에서 찔린 것이다. 오삼은 순간적으로 눈을 홉떠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분하다.”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으나 적에게 닿지 않았고, 대신 상대의 기합 소리가 들렸다.
“도적놈! 각오해라!”
두 번째 창이 오른쪽 복대로부터 비스듬히 창자와 심장을 관통하고 올라왔다. 몸이 밀리면서 바닥에 쓰러졌으나 이미 충격은 없었다. 눈앞에는 희끗희끗하게 떨어지는 눈송이 환영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외쳤다.
“당읍(堂邑) 땅의 삽시호(揷翅虎) 오삼! 유격 대장으로 첫 창을 질렀다! 대왕! 보십시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 줄을 내려놓는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것은 자존심에서 비롯된 ‘아집’이기도, 사내의 ‘기개’라고도 하겠다.
어느 순간, 선봉을 맡은 초장(楚將) 악백이 고함을 질렀다.
“불을 켜라! 횃불을 밝혀라!”
이제 공격군의 보졸이 영채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병거의 방어벽이다. 갑옷을 동여맨 진나라 장졸들이 병거 뒤에 숨어 창대를 곧추세웠다. 때로는 화살로, 때로는 긴 창으로 대적하는 정예 수비 군사들이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수는 조전(趙栓)이다. 그는 진문공 시절, 공신 조쇠의 손자이다. 날렵한 데다 마상 궁술에도 능해 비연(飛燕, 나는 제비)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시간을 벌어라. 날이 새면 지원군이 온다. 죽을 때 죽더라도 서두르지는 마라. 화살을 있는 대로 쏘아대라. 창대를 세워라. 자리를 지켜라!”
모르는 사이에 날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다. 결국 용감한 조전도 때를 맞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애마와 함께 목을 축였다. 말은 조쇠가 성복 전쟁 때 탔던 그 말의 혈통을 잇고 있었다. 애마의 목덜미를 토닥거려 위로하고 창날의 덮개를 벗겼다. 전장의 모습이 마치 다른 세상같이 일렁거렸다. 길쭉한 창날이 이제 막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번쩍거린다. 말안장 앞채에 몸을 실어 허벅지를 안으로 조이면서 호통을 질렀다.
“대장부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한단 말이냐? 나를 따르라!”
조전의 메마른 목소리가 전장을 울려 퍼졌지만 그를 따르는 이는 많지 않았다. 먼빛으로 말을 탄 적장 하나가 사모(蛇矛, 끝이 뱀처럼 구부러진 모양의 창) 창을 바람개비 돌리듯이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잠시 창을 세우고 자세를 가다듬은 조준은 적장을 노리고 말 배를 걷어찼다. 그러나 결국 다가가지 못했다. 한두 마장을 앞두고 졸개 하나가 내지른 창날이 그가 탄 말의 옆구리를 찔렀다.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그는 중심을 잃고 떨어졌다. 흙 팬 언덕이었다. 사람과 말이 한꺼번에 굴러 흙먼지가 풀썩이는 가운데 조전은 석 자 칼을 휘젓더니 벌떡 일어났다.
“핫하하! 이것도 나쁜 최후는 아니구나. 내가 바로 조전이다.”
말에서 떨어진 조준을 노리고 적의 도부수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다가오는 무수한 창날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섬섬이 빛났다. 그의 왼쪽에서 번쩍하고 물고기 비슷한 빛이 달렸다. 하급 병졸이 주로 쓰는 기다란 댓잎 모양의 창이다. 무의식중에 조전은 악을 썼다. ‘이놈!’ 동시에 잠자리도 벨 수 있다는 그의 칼이 번개 같은 섬광을 그리더니, 어김없이 창의 날목을 잘라 떨어뜨렸다.
“벌레 같은 놈!”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띈 것은 한 개뿐이었으나 사실은 뒤쪽에서도 다른 창날이 동시에 찔러왔다. 조준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덤벼드는 적의 무릎을 향해 힘껏 칼을 옆으로 휘둘렀다. 상대의 몸이 석류처럼 갈라지고 하얀 뼈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 어느샌가 다가온 적의 창날이 사정없이 그의 목에 박혔다. 뜨뜻하니 진한 액체가 이마에서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대번에 시야가 좁아졌다. 그는 다시 한번 웃었다. ‘왓핫핫하.’ 아니, 웃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소리는 나오지 않고 잇따라 찔러대는 창날에, 저린 아픔만이 의식에 남았다.
적장을 찌른 졸개는 조준의 가슴 위에 올라타서 목을 베려 했지만 네댓 명이 한꺼번에 앞뒤에 몰려들어 옆구리, 목, 팔 덮개, 허벅다리를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어버렸다. 그 바람에 다시 여기저기 창날이 꽂히고 후벼 파면서 시신이 너덜너덜해졌다. 흙바닥에 처박힌 그의 시신을 수많은 군사가 지근지근 밟고 지나갔다. 용맹과 의리를 갖추고 명문대가의 후예로서 앞날이 창창하던 조전은 그렇게 필 땅의 황무지에서 젊은 목숨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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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완 (韓 莞) 작가 |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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