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고려사관 민지가 말하는 새로운 불교전래사

김영호 기자 / 기사승인 : 2021-04-06 19: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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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 이야기⑥

 

▲금강산 유점사, 6.25 전란으로 불타기 전 모습이다. 4천여 명이 모일 수 있을 정도로 넓다.(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유점사를 지원하는 영복도감

 

고려의 동수국사(同修國史) 민지(閔漬:1248~1326)는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에서 불교전래에 대해 《삼국사기》와는 다른 사실을 전해주었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신라고기》를 근거로 신라 2대 임금 남해왕 즉위 원년(서기 4) 불교가 들어왔으며 남해왕이 같은 해 금강산 유점사를 창건했다고 쓴 것이다. 민지의 설명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신라 제5대 임금이 불교식 왕호인 파사왕(婆娑王:재위 80~112)인 것이 이해가 간다. 파사왕은 3대 유리왕(재위 24~57)의 아들이자 남해왕(재위 4~24)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금강산 유점사를 창건했다면 그 손자가 불교식 왕호를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고려사》는 민지가 세상을 떠난 20여년 후에 즉위한 고려의 29대 충목왕(忠穆王:재위 1344~1348)이 유점사를 지원하는 국가기관인 ‘영복도감(永福都監)’을 설립했다고 말한다. 충혜왕의 맏아들 충목왕은 만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모후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을 했는데, 덕녕공주는 원나라 쿠빌라이의 핏줄로서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초스발)의 맏딸이다. 재위 내내 상대를 가리지 않는 여성편력과 백성들의 재물약탈로 물의를 일으킨 충혜왕과 달리 왕비 덕녕공주는 원나라 출신임에도 고려의 정치개혁을 지지했다. 충혜왕은 부친 충숙왕의 셋째부인인 경화공주(慶華公主)를 범했다가 쫓겨나는데, 원(元) 황제 순제(順帝)는 어린 충목에게 “너는 아버지를 배우려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배우려는가?”라고 물어서 충숙이 “어머니를 배우길 원합니다.”라고 답하자,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고 한다. 섭정 덕녕공주는 충혜왕이 유흥비 마련을 위해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만든 보흥고(寶興庫)와 매를 잡아 바치던 응방(鷹坊)을 철폐하고 권신들이 독점하던 녹과전(祿科田)을 본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유점사를 지원하는 영복도감을 설치했다. 덕녕공주가 영복도감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금강산 유점사 청동범종.(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유점사에 잇따르는 이적

 

민지는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에서 유점사에 수많은 이적(異蹟)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민지는 “유점사에는 본래 샘과 우물이 없어서 재두일(齋廚日)에 쓸 물을 대기가 어려웠는데, 어느 날 한 무리의 까마귀가 절 동북쪽 모퉁이에 모여서 지저귀며 땅을 부리로 쪼아대자 영천(靈泉)이 흘러 물이 넘쳐 났는데, 지금의 오탁정(烏啄井:까마귀가 쪼은 우물)이 이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지는 한 승려 대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한 승려가 53구의 존상(尊像:불상)을 보고 향을 오래 피워서 연기를 쏘인 곳이 검게 변했다. 금색 형상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을음을 끓여 닦으려 하자 갑자기 뇌우가 쏟아지고 다섯 구름이 둘러쌌고, 53구 불상은 모두 날아서 서까래 위로 올라가 늘어섰다. 3구의 불상은 허공으로 올라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는데 승려는 갑자기 광질(狂疾)에 걸려 죽었다. 주사(主社) 연충(淵冲)이 탄식하며 세 구의 불상을 따로 주조해서 보충했지만 원래의 불상들이 이를 배척하면서 연충의 꿈에 나타나서 “다른 불상을 이 자리에 앉히지 말라”고 말했다. 사라진 세 불상 중 두 구는 구연동(九淵洞) 만 길 낭떠러지 석벽(石壁) 위에 있었는데 한 구는 힘껏 내려서 되돌려놨지만 사람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한 구는 지금까지 그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구는 수정사(水精寺) 북쪽 절벽 위에 있었는데 그 절의 승려가 사다리를 놓아 내려놓은 후 수정사에 봉안했다가 뒤에 선암(船巖)으로 옮겼다. 24년 뒤인 정해년(丁亥年:1227)에 양주(襄州) 현령 배유(裵裕)가 원 위치인 유점사(楡岾寺)로 옮겨 안치했다. 유점사 창건 연기는 조선 후기 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1774~1851)가 금강산 여러 사찰들을 답사하고 쓴 《불우기》 중 〈유점사(楡岾寺)〉에도 그대로 나온다. 홍경모는 이 글에서 “유점사는 신라 남해왕 원년, 곧 한(漢) 평제(平帝) 원시 4년 갑자(서기 4)에 창건되었으니 신라에서 지금까지 이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 능인보전.(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유점사의 중창에 얽힌 이야기

 

민지는 “무릇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무꾼이나 목동들도 모두 두려움에 떨었는데, 하물며 식자(識者)들은 어떠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민지는 종에 이상이 있으면 큰 가뭄을 만나고, 종을 닦으려고 하면 비가 내렸고, 또 종에서 때때로 진액(津液:액체)이 나왔는데 이는 모두 나라의 재앙과 복에 응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민지는 이런 이야기를 전한 후 “사찰의 폐하고 흥한 것에 대해서는 전해들은 말에 의거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민지는 고려 때 유점사의 중창에 대한 이야기들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조(本朝:고려) 의종(毅宗) 22년 무자(戊子:1168)에 도인(道人) 자순(資順)이 묘향산(妙香山)에서 와서 이 절에 머물렀다. 비구 혜쌍(惠雙)이 그 뒤를 이었는데, 혜쌍(惠雙)도 개연히 개창(改創)의 뜻을 세웠다. 그때 서경(西京)에 양처사(梁處士)가 있었는데, 술수(術數)에 능한 사람이어서 조정에 이를 알리고 땅에 메워 5백 여 칸의 당우(堂宇)를 크게 지었다. 양처사는 기유년(己酉年)이 되면 정법(正法)을 크게 펼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명종조(明宗朝)에 조계대선사(曹溪大禪師) 익장(益臧)이 오자 사방에서 학승(學僧)이 구름처럼 당(堂) 아래 모여들었는데, 그때가 바로 기유년(己酉年:1189)이었다〈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의종 때 도인 자순과 비구 혜쌍이 유점사를 중창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다가 서경의 양처사가 5백여 칸의 당우를 크게 짓고는 기유년에 정법을 크게 펼칠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실제 명종 19년 기유년에 조계대선사 익장이 나타나 사찰을 크게 중흥시켰다는 것이다. 익장은 다른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조계대선사’였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 불교의 최대종단인 조계종과 관련 있는 인물일 것이다. 몽골이 침략하면서 유점사도 어려움을 겪는데, 민지는 “고종조(高宗朝) 병자년(丙子年:1216) 이래로 재앙에 시달리고, 나라가 병화(兵火)로 들어가 많은 환란을 겪었으며 승려들은 쇠잔해지고 건물은 오래되어 향불이 끊어져갔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종 3년(1216) 고려는 전란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해 8월 몽골에 쫓긴 거란군사들이 고려 서북계(西北界)에 밀려들자 고려는 삼군을 보내서 막게 했는데, 이후 고려는 몽골군이 일으키는 전란에 깊숙하게 끌려들어갔다. 그 후 충렬왕 10년(1284)부터 50여 칸의 전각을 만들기 시작해 10년만인 충렬왕 20년(1294) 완공했는데, 50칸짜리 전각 하나 짓는데 10년이 걸렸으니 이 시기 고려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 수 있다.

 

“을미년(乙未年:1295) 여름에 되자 도인과 승려 4천여 명을 초청해 상석(象席)을 크게 열고 낙성했는데, 이해 이후로 병란이 잦아들고 풍년이 들어서 양식이 끊이지 않았고 납의(衲衣:승려의 가사)를 입은 자들이 많이 귀의해서 진성(眞性)을 밝혔다. 이로써 중외의 사녀(士女)들이 더욱 깊이 존경하며 믿고 혹은 공양을 베풀고 혹은 첨례(瞻禮)를 행해서 왕래하는 자가 마치 시장에 가는 사람처럼 많아졌다〈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남은 문헌과 노인들의 구전으로 〈사적기〉를 지었다.

민지는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를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 이 산은 본래 대성(大聖) 담무갈(曇無竭)의 진신(眞身)이 거처하는 곳으로 그 이름이 대경(大經:화엄경)에 실린 실로 천하의 명산이다. 이 불상 역시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주조하신 것으로 멀리 천축(天竺)에서 이 산으로 왔다.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가 이처럼 빛나니 그 유래를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과 유점사가 모두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의 병화(兵火)로 산중의 오랜 기록이 다 사라졌으니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후에 전해 듣는 자가 또 이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서 오늘날 널리 찾아 남은 기록과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한 것을 찾아 내가 기록했다. 내 기록은 공교롭게 꾸며낸 것이 아니다…대덕(大德) 원년 정유년(丁酉年:1297) 11월〈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고려 사관 민지가 전하는 이런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되었다.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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