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작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안진영 기자 / 기사승인 : 2021-03-22 12: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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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미술 고정관념 파괴한 원조 한류스타

▶백남준, ‘푸른 부다’, TV 모니터, 네온, 150×250×250cm, 1992~1998(갤러리 아트링크 소장)

‘호사가(好事家)’란 말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흥밋거리를 일삼아 좇는 사람’을 일컫는다. 꼭 부정적인 뜻만은 아니다. 이런 호사가들은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인물, 특히 예술가나 연예인에게 이런저런 ‘레테르’(평가 낙인)를 붙여 부르길 좋아한다. 그렇다면 백남준만큼 화려한 수식어가 많은 예술가가 또 있을까? 백남준을 설명하는 호칭은 다양하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대표적. 이것 말고도 ‘문화 테러리스트’, ‘20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살아 있는 신화’, ‘늙지 않는 뉴욕의 악동’, ‘충격과 파격의 예술혁명가’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요즘 한류를 대표하는 대중음악 그룹 방탄소년단(BTS)에 버금갈 만큼 칭송 일색이다. ‘아미’(BTS 팬클럽)가 들으면 섭섭해 할 수도 있겠지만, 백남준이야말로 진정한 미술계 원조 한류스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2006년 1월 29일(한국시각 1월 30일), 백남준은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74세.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 로비에 설치된 ‘TV 나무’와 ‘TV 깔때기’, 1995

한국을 넘어 세계인으로
백남준은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했다. 당시 서울 시내엔 자동차가 몇 대밖에 없었다는데, 자동차를 타고 등교했고 피아노를 싣고 금강산으로 가족여행을 갔다고 하니 집이 어느 정도 부자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유치원을 다녔고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홍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때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대학은 일본에서 나왔다. 도쿄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고 1956년 다시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에선 현대음악가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년)를 연구했다.
이처럼 일찍부터 국제적 감각을 몸에 익힌 청년시절 백남준은 미술이 아닌 음악으로 예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 만난 두 예술가, 즉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년)와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년)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개념미술가이자 사회적 조각가, 행위예술가, 교육자인 요제프 보이스는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요제프 보이스는 백남준이 미술로 전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마침 2021년은 요제프 보이스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2021년 유럽 전역에서 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아무튼, 백남준은 이들과 함께 플럭서스(fluxus)라는 전위적인 예술가 그룹에 적극 가담했고,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미술가로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음악의 전시-전자TV>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 창시자’로 각인시켰다. 이때 백남준은 텔레비전(TV) 위에 자석을 올려놓아 전자기장을 조작함으로써 텔레비전 화면을 해체하고 왜곡시켜 추상화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런 전위적인 실험이 바로 ‘비디오 아트’의 시초로 미술사에 기록되고 있다.

▶1988년 일반에 처음 공개됐을 당시 ‘다다익선’ 광경

▶백남준, ‘자석 TV’, 1963

백남준이 개척한 비디오 아트
현대미술에서 모니터나 비디오 같은 영상매체를 사용하는 게 이젠 당연히 여겨진다. 아날로그 방식은 옛말, 최첨단 디지털기기와 인터넷 활용도 보편화됐다. 백남준이 개척한 비디오 아트를 계기로 수천 년 동안 답습된 미술의 고정관념이 산산이 깨졌다. 색채와 물질로서 미술, 시각예술로서 미술, 유일한 원본의 가치를 지닌 미술, 움직이지 않는 미술이라는 신화는 사라졌다. 백남준 이후 미술은 물질로서 색채뿐만 아니라 비물질인 빛과 소리까지 다루게 됐다. 시각을 넘어 청각의 영역까지 아우르게 됐다. 또한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이미지로서 전통미술의 장르개념 역시 무너졌다. 미술의 범위는 시간성과 움직임까지 포함하는 ‘무빙 이미지(moving image)’로 확장됐다.
개인전 이후 백남준은 독일을 떠나 다시 미국 뉴욕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모든 예술의 중심지는 뉴욕이었기 때문이다. 뉴욕에 입성한 백남준은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기행(奇行)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TV와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면서 뉴욕 예술계에 차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2년 휘트니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고 1984년엔 세계 최초로 파리, 뉴욕, 베를린, 서울을 인공위성으로 연결해서 방송으로 생중계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유명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그것이다.
백남준의 기상천외한 행보는 쉼 없이 계속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인공위성을 이용한 퍼포먼스 <손에 손잡고>를 선보였다. 1993년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베니스비엔날레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권위 있는 국제미술제다. 이때 백남준은 독일 국가관 대표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했다.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생긴 건 1995년, 이 역시 백남준의 노력 덕분이었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불편한 몸으로 2000년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서울 호암갤러리, 로댕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여기서 처음 선보인 레이저를 이용한 작품은 또다시 미술의 표현방식을 확장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층 로비 원형전시장에 설치된 대표작 ‘다다익선’의 웅장한 본모습을 속히 다시 볼 수 있길 바란다. 10월 3일 개천절을 상징하는 브라운관 TV 모니터 1003개를 쌓아올린 이 작품은 여전히 보존복원 중이다. 다행히 이런 아쉬움을 달랠 곳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다. 경부고속도로 수원·신갈 나들목에서 5~10분 거리에 위치한 백남준아트센터 관람을 적극 추천한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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